내 영화취향은 다른 이들의 기준에서 볼 때 특이하단 평을 듣는다. 어릴적부터 주된 관심은 호러물과 고어물(나이트메어, 이블데드, 오멘, 13일밤의 금요일 시리즈, 미저리, 캐리,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 사건, 링시리즈, 주온시리즈 등)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최근 몇 년동안
공포영화다운 영화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별 수 없이 영화 선택기준은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장르로는 내 취향을 맞출 수가 없어서 다른사람들이 잘 안 보는 영화나, 원작이 있는 작품들을 주로 선택하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영화제 수상작을 주로 보는데(비평을 칼날을 쥐고 가자미눈을 하고 시크한 표정으로 죽음의 냄새를 맡는 비평가들의 음습함을 뛰어
넘은 작품들이 갖는 작품성과 연기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2009년 각종 영화제를 휩쓸다시피 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인터넷에서 접하고는 3월 19일 개봉을 기다렸다.
목요일 오후 7시 10분 프로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전 프로인 오후 5시 프로가 끝나고 나온 관객의 수는 달랑 한 명!
ㅎㅎㅎ 참 나의 유별난 취향을 다시금 확인하며, 총 관람객 10여명 정도가 기다리는 가운데 영화는 시작되었다.
대니보일 감독의 전작 <트레인스포팅>을 봤던(역시 남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영화라서....)기억은 황당함이었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그래서 그 시기 광고에 많이 차용되었던
장면을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작품이다. 도대체 줄거리가 있기는 한 건지 영화의 말미까지 의문인
한 무리 젊은이들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바로 <트레인스포팅>이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이완 맥그리거'라는 배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음....기억이 가물거려서
정확도는 장담할 수 없다) 암튼 주류를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비주류들의 '광기'라고나 해야 할까?
젊음은 그들이 담기에는 용량초과의 버거움으로 보였다.
이후 작품인 <28일 후>는 전작과는 장르의 변화폭이 큰 좀비호러물이다.(ㅋㅋㅋ..나의 장르다.) 어느 날 옆집 소녀가
미쳐 날뛰며 부모를 물어 뜯고, 소녀에게 물린 부모는 곧 감염되어 다른 이들을 살육하는 괴물이 된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좀비들(이미 뇌사 상태이므로-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고로 좀비:살아있는 시체)의 인간사냥으로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후의 탈출을 시도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내 생각으로는 이 영화가 있었기에 밀라 요보비치가 주연해서 3탄까지 나온 <레지던트 이블>시리즈가
나오게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해보기는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있었으나 이는 흡혈 뱀파이어가 출몰하는 사막의 어느 술집에 국한된 이야기로 전 인류적인 재앙을 다룬
좀비물과는 이야기범위의 차이가 있었다.
<트레인스포팅>에서 기존 영화의 서사체계를 뒤흔드는 파인더의 세계를 보여준 감독의 영상기법은 <28일 후>에서 인간을 사냥하는
좀비들의 실감나는 영상을 통해 실제가 아님에도 미래 인류에게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실재감을 보여줬고, 다시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흔들어놓기에 이르렀다.
문학과 영화 모두 현실에 뿌리를 두고 이를 반영하는 장르이지만 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모습을 옳바르게 반영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작품을 통해 가치관의 전복과 시대발전의 방향성을 제시한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나 상업성을 고려해야 하는 영화장르에서 이를 기대한다면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일 것이다.
이 작품이 각종 영화제를 휩쓴 이유가 바로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와 사람들의 고착화된 가치관을 깸으로써 사람들에게 준 감동에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극중 18세인 주인공 자말 말리끄는 콜센타에서 차심부름을 하는 보조원(짜이왈라)이다. 그는 인도 빈민가에서 태어나 회교도의 폭력으로 인해
어린나이에 엄마를 잃고, 형 살림과 라띠까라는 소녀와 함께 마먼패거리이 시키는 구걸로 살아왔다. 마먼이 구걸을 위해 아이들의 눈에 끓는
쇳물을 부어넣어 맹인을 만드는 광경을 본 후 형 살림과 자말은 마먼패거리로부터 도망치지만 그 과정에서 라띠까를 놓치고 만다.
자말은 그 이후에도 계속 라띠까를 찾아나서고 형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라띠까를 찾았으나 이번에는 형이 가입한
폭력조직의 두목에게 그녀를 뺏기고 그녀의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자말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있을 라띠까를 찾기 위해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퀴즈쇼'에 출연한다.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그가 퀴즈쇼 사상 처음으로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오게 되자, 퀴즈쇼의 진행자는 이를 의심하고
마지막 문제 촬영전날 그를 경찰에 사기죄로 고소한다.
경찰은 자말의 사기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구타와 고문을 가하지만 그의 말이 모두 진실임을 깨달은 경위는 혐의없음으로
그를 풀어주고 자말은 마지막 문제를 풀어 2천만루피를 획득하고는 라띠까와 재회한다.
이 영화의 초점은 자말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맞추어져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이면을 보는 듯한 흔들리는 자말의 눈동자는 퀴즈쇼에 참여한 그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백만장자되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투명하도록 맑은 흰자위에서 흔들리는 크고 검은 동공은 퀴즈쇼가 진행되는 중에도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그렇게 현재에 과거장면은 계속해서 개입한다.
파리가 득실거리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눈부신 햇살에 눈살을 찌뿌리는 대신 눈부시게 예쁘다는 듯이
웃는 자말, 자신의 우상인 가수의 싸인을 받기 위해서는 똥물을 뒤집어쓰는 고통도 이겨내는 그의 모습은
그가 극한의 현실을 살아가지만 결코 꿈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도 맞추지 못한 문제들의 정답을 알고 있는 자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정답이 일반인 보편성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모두가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그가 퀴즈쇼에 참여한 것에
대해 슬럼독(빈민가의 개)이라며 조롱했지만, 인생의 매 순간순간을 진지하게 살아 온 그의 지혜 앞에
세상의 측정치는 무의미한 것이다. 퀴즈쇼의 문제들의 정답은 자말이 살아 온 인생의 갈피 곳곳에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퀴즈쇼의 마지막 단계만을 앞둔 그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진행자의 행동들은 가진자가 없는자에
갖고 있는 극도의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다. 최소한의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그들의 삶을 이끄는 희망의
정체를 자말에게서 찾은 사람들은 자말이 마지막 문제의 정답을 맞춰 꿈을 이루기를 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자말은 마지막 문제를 듣고서 그 정답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 문제를 맞추지 못하면
지금까지 이룬 상금이 모두 무효가 되는 순간에도 그는 흔들림이 없다.
가진자들이 자말을 시기하며 사기죄로 고소하고 그의 앞길을 막을지라도 그의 형 살림의 유언처럼,
신은 위대하고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래서인지 그가 퀴즈쇼의 승자가 될 것인지는 궁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라띠까에게 보여주기 위해 퀴즈쇼에 출연했던 것처럼, 나 또한 자말로 인해
아직 봄이 오지 않았지만 희망의 따스함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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