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인과관계의 사슬을 끊은 꿈의 기록!

묭롶 2018. 10. 30. 20:42

  간밤에 꾸었던 꿈을 기억해보자.  만약 지난밤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동안

잠들었던 동안에 꾸었던 꿈을 되돌이켜보자.  꿈을 되돌이켜보면 기억나는

꿈보다 내가 어떤 꿈을 꾸었다고 설명하기 힘든 꿈들이 난무하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 꿈은 우리가 현실에서 읽는 글이나  매체들이 지니는 서사의

인과관계를 갖지 못한 하나의 이미지나 느낌이라고 볼 수 있겠다.  꿈을 꾸는

동안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미지의 혼합체들이 연속해서 출몰하는 것이 꿈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나는 항상 꿈을 꾸어야 하고, 그 꿈들은 말이 되어야 하고,

나는 말과 씨름해서 최선의 것이든 최악의 것이든

그걸 형상화해야 하는 겁니다.  ~

내가 쓴 글에 관해서 말하자면, 난 그걸 다시 읽는 법이 없어요.

그걸 잘 모른답니다. 

내가 뭘 썼다면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거에요.

그리고 일단 글이 출판되고 나면 난 최선을 다해서, 아주 쉽게 그걸 잊어버리죠.  」  p24


  『보르헤스의 말』을 읽으며 내게 가장 와 닿았던 문장은 자신이 쓴 문장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보르헤스의 말'이었다.  그 스스로 썼지만 기억하지 못했노라 대중 앞에 공언하는 보르헤스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작품의 일부를 인용하는 친구와 독자 앞에서 도서관에 와서 책 제목을 말하고 찾는 이용객 앞에 선 사서처럼

친절하게 자신의 작품을 기억 속의 도서관에서 현재로 가져와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나는 내 운명이 읽고 꿈꾸는 것임을 알았어요.

어쩌면 글을 쓰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글쓰기는 본질적인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늘 낙원을 정원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생각했어요.

(내 시에도 그런 시구가 있답니다.)

그건 내가 늘 꿈을 꾸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p221


  마치 전날 밤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는 상대방에게 대답하기 위해 그 꿈의 내용을 기억해내려 애쓰는 사람처럼 '그 작품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보르헤스의 말에서 그의 작품이 그가 현실 속에서 눈을 뜬 채 꿈꾸며 그려낸 '꿈의 기록'

이란 사실을 추측하게 된다.  그의 작품이 '꿈의 기록'이라는 가정하에서 출발할 경우 독자와 청중 앞에 나설 때, 보르헤스의

겸손함의 원인 또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꿈'이라는 인과관계와 서사를 떠난 장르를 타인에게

설명할 때의 막연함은 바로 서사의 부재 보다는 꿈의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언어'에 그 원인이 있다.


  예를 들어 보르헤스의 어린시절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던 질문들을 떠올려보자.  '오랜지는 무슨색이지?', '오렌지는

무슨 맛이지?'  우리는 보편적으로 오렌지는 오렌지색이고 오렌지는 오렌지 맛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시력이 없어서

오렌지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오렌지의 색'을 설명한다는 건 가능한 것인가?  또한 '오렌지의 맛'을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오렌지의 맛'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작중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제논의 역설'을 학습시키기 위해 '오렌지'를 예로 들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오렌지를 통해 우리는 구어(口語)를 표현해내는 문어(文語)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꿈'을 꾼 당사자가 생생하게

느끼는 이미지를 왜곡없이 담아낼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보르헤스는 그 누구보다 절감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눈 멀어 보지 못하는 희뿌연 빛으로 가득찬 세계속에 떠오른 글의 심상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다듬고 또 다듬어

문장으로 내놓지만 그건 언제나 원본을 100% 반영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대상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저작물을 자신의 서재에 올려놓지 못하며 또한 그 저작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작품을 잊었노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언어가 의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해요"」p295

=> 「언젠가 테니슨은 만일 우리가 한 송이의 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누구이고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자히르> p145~146


  그런 의미에서 다섯 개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아랍어에 고대 노르딕어까지 섭렵하려고

애썼던 보르헤스의 노력이 어쩌면 생각하는 것을 완벽하게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탐구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노틀란티스 문명이 세운건축물들의 설계도를 찾는 과학자처럼 보르헤스는 최초의 언어를 통해 '의미'에

이르는 체계를 찾고자 했던건 아닐까?)  분명 언어가 종족에 의해 분화되기 전에는 생각한 그대로를 왜곡없이 '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가 있었을거라고 보르헤스는 추측했는지도 모른다.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에 다양한 언어를

통한 수수께끼를 심어 놓았던 것처럼 보르헤스에게 '현재'는 한 가지 언어로는 풀 수 없는 다층의 의미를 지닌 수수께끼와

같았을 것이다.


「나는 인물을 창조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나 자신에 관해 글을 끈답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인물을 한 사람도 창조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건 항상 나 자신이에요. 

가상의 시간이나 상황에 처한 나 자신인거죠.  」p310

=> 「끝이 가까워지면 기억의 모습들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단어만 남는다.

시간이 한때 나를 묘사했던 말과 오랜 세월 동안 나와

함께했던 운명의 상징인 단어들이 혼동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나는 호메로스였다.  」  〈죽지 않는 남자〉 p32


  그 '모든언어'를 통해 '의미(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시화의 영역으로 가져오는)'를 찾으려는 시도를 그토록 원하던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던 보르헤스는 이제 지금의 '현재'에는 없다.  하지만 나는 『보르헤스의 말』을 통해

'보르헤스'라는 미로를 벗어나 '보르헤스'에게 이르는 길을 찾은 것만 같다.  '난해'와 '난독'으로 다가왔던 '보르헤스'가

목소리를 지닌 실체로서 내 앞에 다가와 자신의 지난밤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나는 이제야 그의 '단편'들에

다가가는 통로를 찾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