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삶의 영역확장을 위한 가능성의 미로를 <픽션들>에서 발견하다.

묭롶 2018. 1. 2. 13:00

  나는 몇년 전 횡단보도를 급히 건너다 차에 치일 뻔 했었다.  그 뒤로 나는

실제의 나는 과거 횡단보도 사고로 이 세상에 없고 내 정신만 살아남아 지금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된다. 


「서로 가까워졌다가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를 잘라 버리거나 아니면

수백 년 동안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들로 이루어진 직물은 모든 가능성들을 포함합니다.

그런 대부분의 시간 속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당신은 정원을 가로지르다가

죽어 있는 저를 발견했을 겁니다. 

또 다른 경우에 저는 지금처럼 똑같은 말을 하지만,

하나의 실수, 즉 유령이지요."」 p126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영화 <매트릭스>에서 실제 육체는 잠들어 있지만 기계가 제공하는 전기자극에 의해 발생하는 꿈을

실제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매트릭스 속 사람들처럼 육신으로서의 나의 실존과 사고하는 나의 실존의

불일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현실에서 한발자국 떨어지게 만든다. 


  과거로부터 삶은 그 삶을 사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이끌어간다고 규정해왔지만, 나의 현실감각은

그런 통념과는 달리 현실과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있다.  나의 이런 괴리감의 원인을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화요일에 X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가다가 동전 아홉개를 잃어버린다. 

목요일에 Y가 그 거리에서 수요일에 내린 비로 약간 녹이 슨 동전 네 개를 발견한다. 

금요일에 Z는 길에서 동전 세 개를 발견한다. 

금요일 아침, X는 자기 집 복도에서 동전 두 개를 발견한다.」

p26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 갖고 싶은 볼펜과 잃어버린 동전의 일화를 통해 '나'라는 본질은 인식하는

시점과 공간 그리고 상황에 의해 유동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현재라는

연속성의 시간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입체적이어서 어느 한 면에서의 접근으로 파악이 불가능하며

그 총합을 획득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 보르헤스식 논리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논리를 '미로'라고 표현한다.  그의 단편집 속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인간의 삶에 대한 우화이다.  '나'라는 중심을 찾아 미로의 공식처럼 왼쪽으로 또 왼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지만 결국 <바벨의 도서관>처럼 그 안에서 찾게 되는 것은 그 일부의 파편일 뿐이다. 


「그는 불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불길은 그의 살을 물어뜯지 않았다. 

 불길은 그를 쓰다듬었고,

아무런 열기도 없이 아무멋도 연소시키지 않은 채 그를 불로 뒤덮었다. 

안도감과 치욕감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 역시 그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76<원형의 폐허들>


  '나'인줄 알았지만, '내'가 아니고 '현실'인줄 알았지만 과거의 반복이며 '실제'인줄 알았지만

'꿈'인 그의 단편집을 읽으며 나는 내가 인식하고 바라보는 내 앞에 보이는 세계 뿐만 아니라 내 뒤에
펼쳐진 비인지의 세계까지도 나의 현재로 편입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영역의 확장 가능성이 보르헤스가 문화전반에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는 신에게 자기의 작업을 끝낼 수 있도록

꼬박 일 년이라는 기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그에게 일년을 부여했다. 

하느님은 그에게 비밀의 기적을 내렸다. 

하사관이 명령을 내리고 군인들이 명령을 실행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일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희곡을 완성했다. 

이제 단 하나의 성질 형용사를 해결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고,

얼굴을 막 흔들었고 네 번에 걸친 일제 사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p194~195 <비밀의 기적>


  특히 그의 단편 <비밀의 기적>을 읽고 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불분명한 시간의 연속성)과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의지와 운명』(잘린 머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리고 살만 루시디의 『천사의 시』(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살아남은 살라딘과

지브릴의 이야기)에 보르헤스가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르헤스의 단편 <비밀의 기적>에서 작가가 허락받은 일반적 시간관념과 다른 일년의 시간처럼

보르헤스로 인해 문학은 서사와 장르, 그리고 허구와 실제의 경계선을 허물어버림으로써 그 표현의

영역을 무한으로 넓힌다.  보르헤스 식의 영역확대는 표현의 영역 뿐 아니라 인지와 인식의 세계로도

확대된다.

  영화 <사일런트 힐> 속 죽음의 마을에서 딸을 찾아 돌아온 엄마가 돌아온 공간처럼 나의 현재

또한 내가 무엇을 인식하느냐에 의해 그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이

보르헤스가 나에게 걸어놓은 미로의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