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김훈

< 라면을 끓이며 > 글의 둘레길을 돌아 인간 김훈을 만나다.

묭롶 2018. 6. 3. 16:50

  내가 주로 읽는 책은 소설이다.  특별히 산문집을 기피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왜 산문이 잘 읽히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무래도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의 성향 탓인 것 같았다. 


  나에게 산문은 누군가를 만나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과정과 같다.  그런데 나는 글을 읽으며 글이 향하는 통로가 아닌

전혀 다른 길로 생각이 향할 때가 많아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힘든 일이다.  쉽게 말해 내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란 얘기가

되겠다.


  그런 내가 김훈 작가의 산문집은 읽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의 문장이 쉽게 쓰이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자전거

여행에서 만난 서해안 염전의 소금제조자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그속에서 추출하여 길어올린 그의 문장은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라면을 끓이며』는 「밥」, 「돈」, 「몸」, 「길」, 「글」에 관한 인간 김훈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햇빛 좋고 바람 좋은 날,

느긋하게 혼자 걷는 둘레길처럼 이 책의 구석구석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원고지 10장을 쓰려면 50장을 버려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글쓰기는 원석의 가능성이 있는 무수히 많은 바위들을 깎고 또 깎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그런 그가 세월호에

대해 써놓은 글을 보며 나는 세월호에 대한 무수히 많은 말들과 글들이 담아내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재를 확인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이 아니라,

그  일상화된 악의..폭발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시대의 난제를 극복해본

역사적 경험이 전무하거나 매우 빈곤하다.  」p174


   물론 이 책을 읽으며 그의 모든 생각에 동의가 되는 건 아니다.  난 그저 김훈이라는 한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와 독재정권의 시절을 살아가며 그 시절의 회오리 속에서 마모되어 가는 울분과 글쓰기로 밥을

벌어 먹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그의 삶에 새긴 나이테가 옹이처럼 그 마디가 느껴지는 그의 산문집은 그 자체로

삶이 그에게 새겨놓은 각인과 같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읽는게 아니라 그 문장 하나하나를 굳은살이 옹이처럼 박힌

손을 만지듯이 손으로 자꾸만 더듬는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다치거나 망가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망가진 사람들의 내면에 끝

끝내 망가질 수 없는 부분들은 여전히 온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p315


    이 책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으며 그를 단편소설 「화장」으로 처음 만났던 2004년을 떠올려본다.  나는 매년 새해초

챙겨 읽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김훈의 문장을 처음 만났다.

사건을 가감없이 전하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던 그가 쓴 단편소설 「화장」의 문장에서 나는 기존의 문장과 다른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문체가 있는데, 윌리엄 포크너와 코멕 멕카시 그리고 김영하의 문장에서

나는 글을 쓴 작가의 독특한 특징을 찾아내곤 했다. 


  김훈 작가의 문체는 군살없이 단단하게 신체를 단련한 마른 몸집의 사내를 떠올리게 한다.  요령없고, 유머도 없고, 왠지

인스턴트도 안 먹을 것 같은 외고집이 느껴지는 문체....... 그의 문체에서 느껴지는 '고집'을 나는 그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를 읽으며 자주 발견하게 된다.  우스갯말로 영화에서 들었던 "난 한 놈만 패"가 연상되는 외곬의 방향성이 느껴지는 그의

산문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 외곬 속에 담긴 소통의 희망을 발견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된장이나 간장, 무짠지, 오이지, 고추장아찌는 맛의 심층구조를 갖는다.

시간이 그것들의 맛의 심층을 빚어낸다. 

기다림 없이는 짠지다운 짠지를 맛볼 수 없다. 

~시간이 간을 재료의 안쪽으로 밀어넣고 재료의 성질을 변화시켜 맛의 심층을 이룬다.

그 맛은 거기에 절여진 시간의 맛이다.  」p22


  그래서 아직도 김훈의 글을 만나는 건 내가 기다리고 기뻐하는 일이다.   그의 산문집 속 짠지나 나물을 씹을 때 느껴지는

그 재료 본연의 맛과 향, 그리고 그 재료를 길러낸 햇빛과 강수, 그 재료에 스며든 삼투(시간과 소금, 된장, 간장 등)를 그의

문장에서 느끼게 된다.  그 문장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이 정직하고 가감을 모르는 사내가 느끼는 감정을 문장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느껴본다.   쉽게 쓰여지지 않는 글을 막연히 기다릴 때의 고통과 그 지난한 추출의 과정을 통해 길어올린

문장을 연필로 적고 손날이 새까매지도록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김훈작가의 모습이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문장에

겹쳐보인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김훈 작가의 문장이 지닌 힘이고 무게라는 생각을 해본다.


ps: <삶이 지닌 가능성의 힘>  :  「 그러나 불을 만나기 전의 반죽의 아름다움은 몽상 속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반죽의 아름다움은 흙의 깊은 안쪽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들의 아름다움들이다.  불이 그 가능성을

발휘시킨다.  」p347  참.....이런 문장을 만날 때면 이 작가가 지닌 인간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느껴져서 참 기쁘다.

내 안에 돋을새김한 세월의 무늬가 무엇일지 난 김훈의 문장을 읽으며 궁금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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