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김훈

<흑산>-말이 되어지지 않는 말의 기록

묭롶 2011. 11. 24. 08:17

  어쩌면 이 책과 『공무도하』의 시작은 김훈의 전작 『바다의 기별』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래포구 어드매쯤에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바닷물로 유입되는 민물의 궤적을 해가 저물도록 지켜보던 작가의 마음 속에 맺힌 심상이 『공무도하』가 되고 『흑산』으로 문자화된 것 같다.  『공무도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적스러운 삶이라는 강물을 건너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흑산』은 시대라는 세찬 물결을 온몸에 새기며 나아가는 힘겨운 민초들의 이야기이다.  이 두 작품 모두 물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작이 개별적인 인간의 삶에 주목한 반면,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삶의 모습이 모여 시대라는 하나의 물결을 이룬다.

 

   빗방울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강물로 합쳐져 바다로 가는 것처럼 서로 각각인 듯한 인생사도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그 개별성이 무화된다.  제각각 알록달록인 인생들이 모여서 시대를 이루고 한 시대의 정체성은 그보다 큰 역사의 흐름 속으로 합류된다.  그렇게 역사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계속해서 흐르지만 그 흐름의 물결을 이루는 대상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시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화두'이다. 

 

   김훈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을 쓰는게 아니라 길어올리거나 추출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김훈이 주목하는 '인간'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에 속한 개별자로서의 인간이다.  고등어의 몸에  새겨진 물결의 무늬처럼 역사의 흐름이 한 사람에게 그려넣은 무늬를 『내 젊은 날의 숲』에서 세밀화를 통해 꽃을 그려내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가는 글로 뽑아 올리고 있다. 

   

산에서 칡을 캐거나 어린 소나무를 뽑아낼 때, 순매는 바다에 뜬 고깃배를 보면서 

울었다.  저 생선 한 마리처럼 작은 것이 어쩌자고 수평선을 넘어 다니면서 생선을 

잡는 것인지 순매는 배들이 가엽고 또 징그러웠다.~순매는 고갯배가 생선과 똑같이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생선의 대가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면 아가미가 여전히 살아서 벌컥거렸다.  ~이 얼레빗 같은 것으로 숨을 쉬면서 바다를 건너다니는 것인가. 

 ~순매는 그 내장들을 들여다보면서 물고기 세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낯선 곳이겠거니 여겼다.  한 줌의 내장과 한 뼘의 지느러미를 작동시켜서 바다를 건너가고, 

잡아먹고 달아나고, 알을 낳고 정액을 뿌려서 번식하는 물고기들의 사는 짓거리가 

순매는 눈물겨웠다. 」 p296~297   

 

  작중에서 생선의 내장을 보며 순매가 느끼는 감정은  김훈의 글쓰기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다른 대상을 투영하고 그 대상의 확장을 통해 하나의 통찰력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그만의 글쓰기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이는 인간의 사유의 과정과도 일치한다.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 인간은 독자적인 방식이 아닌 복합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사유한다. A = B가 아닌 A를 통해 B와 C를 연상(순매가 고깃배를 보며 가슴이 짠해지고 또 물고기의 내장을 보며 눈물이 나는 것처럼)하는 인간의 사유는 함축과 비유로 이뤄진 '시'를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대의법적 사고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넘어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무수히 많은 대상의 속성 중 특징적인 부분을 표출하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언제나 언어에 의한 해석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같지 않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 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玆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 p338

 

  김훈은 과거 역사에 기록된 시대적 특징을 기록하는 일반적 방법론 대신,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인물들의 삶의 기록을 통해 하나의 통찰력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택한 듯 하다.  아마 그의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에 등장인물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대의법적 사유를 통해 개별적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확장되고 그 시대가 동시대인들에게 새겨넣은 궤적들 속에서 우리는 나를 넘어 동 시대를 살아가는 동류로서의 타인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또한 역사의 흐름앞에 개별자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 물결을 거스르려했건 사람들의 이상향이 어디에 있는지와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 어디에 있는지도 고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