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가르시아 마르케스

<썩은 잎>과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와 <율리시스>의 공통점을 발견하다.

묭롶 2017. 7. 4. 23:30



  나는 한 작품을 읽으며 다른 작품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  작품들간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건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독서 방식이자 큰 즐거움이다.  『백년의 고독』으로 널리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초기작 『썩은 잎』을 읽으며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전개방식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마르케스가 포크너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쓴 책이 『썩은 잎』이었다.  이 두 작품의 가장 큰 공통점은

서사의 진행이 의식의 흐름에 의해 전개된다는 점이다.


  의식의 흐름에 의한 전개는 이미 1920년에 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그 특징적 전개 방식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1920년에 출간된『율리시스』와 1930년 출간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그리고

1955년에 출간된 『썩은 잎』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문학의 계보를 이루는 작품들이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1904년 6월 16일 하루를 배경으로 작중인물(리오폴드 블룸, 몰리 블룸, 스티블 데덜러스)의

의식의 흐름을 담고 있다면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죽음을 맞은 애디 번드런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40마일의 여정 속에서 '달'-'코라'-'주얼'-'듀이 델'-'툴'-'바더만'-'캐시'-'앤스'-'샘슨'-'피바디'-'맥고우원'이라는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이 각각의 단락이 퍼즐조각처럼 놓인 전체 그림이 한 권의 소설을 이룬다.


   마르케스의 『썩은 잎』은 마콘도 라는 마을에서 죽음을 맞은 의사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의사의 집에 들린 대령과

그의 딸, 그리고 손자인 세 인물이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겪는 심리를 담고 있다. 이 세 작품 모두

서사의 전개를 의식의 흐름에 의한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제각각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점 또한 흥미롭다.


  먼저 『율리시스』는 서사의 큰 그림 안에서 각 인물들의 의식이 흐른다면, 포크너의 작품은 흩어놓은 퍼즐처럼 각각의

인물들의 의식이 파편화되어 있다.  그래서 '율리시스'를 읽는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지만 포크너의 작품은

순서를 어떻게 읽든 그건 독서를 하는 독자에 의해 제각각의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2009년에 이 작품을 읽었을때,

특정 단어가 하이퍼텍스트처럼 각 인물들간의 의식의 흐름을 연결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바더만: ~도 어둡지 않다.  그리 어둡지 않다. 

 (여기에서 하늘의 '달'은 바더만의 형 '달'로 의식의 흐름이 변환된다

잭슨에 갔다.  내 형 이, 은 내 형인데....,~잭슨으로 갔다. 

잭슨에 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잭슨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잭슨이 타고 간 기차는 자신이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받고 싶어했던 상점에 진열된 기차를 연상시킨다)

~은 내 형이다.  미쳤다.  ~차라리 바나나를 먹지 않을래?  듀이 델이 말했다.

('바나나'는 길 위 여정이 아닌 정상적인 삶을 의미한다-

바나나를 먹는 행위는 정상으로의 복귀를 원하는 바더만의 의지를 상징한다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면 기차가 진열될 거야

(기차는 다시 형 '달'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잭슨에 갔다.  미쳐서 잭슨에 갔다.  미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아버지, 캐시, 주얼 듀이 델, 나, 모두 미치지 않았으니까. 

우린 미치지 않았고 그래서 잭슨에 가지도 않았다. 

~내 형은 이다.  그는 기차를 타고 잭슨에 갔다.  기차를 타서 미친 것은 아니다. 

우린 마차 안에서부터 미쳐 있었으니까.  .

~잭슨에 가기 위해 그는 기차를 타야만 했다.  난 기차를 타본 적이 없는데....,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기차모형에 대한 열망)

~잭슨은 먼 곳이다.  (이뤄지기 힘든 소망에 대한 자각)~그러나 기차를 타고 있다.

은 내 형이다.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p287~290

 

  윗 글에서 바더만의 의식의 흐름이  달(하늘의 달)->달(내 형)->잭슨->기차->미쳤다->바나나->기차->달

로 변화해감을 살펴볼 수 있다.  단어를 매개로 연상되어지는 의식의 흐름은 인터넷의 하이퍼링크를 연상시킨다.


 제임스 조이스에서 출발하여 윌리엄 포크너를 거쳐 가브리엘 가리시아 마르케스에 이르는 소설문학의 계보상 공통점과

그 다양한 변주방식을 발견하는 건 이번 독서가 준 큰 기쁨이다.  물론 마르케스의 초기작을 통해 그의 작품의 뿌리를 확인하게 된

점도 큰 수확이었지만 포크너와의 관련성을 통해 다시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 더 즐거운 독서였다.


  그럼 마르케스의 작품이 조이스나 포크너와 다른점은 무엇일까? 

  손자- 「' 두 시 반이야.'  그리고 이 시간에 (기차가 마을의 마지막 굽은 철길에서 기적을 울리는 동안)

       아이들은 오후 첫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에서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p18


  딸- 「' 두 시 반이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시간에 모든 마콘도 사람들이 우리가 이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p22


  대령- 「'두 시 반이야.'  하고 나는 생각한다.  '1928년 9월 12일 두 시 반, 이 남자가 처음으로

             우리 식탁에 앉아 먹을 풀을 달라고 했던 1903년의 그날과 같은 시간이야.'」p33~34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흩어진 퍼즐 조각이라면 『썩은 잎』에서 '두 시 반'은 각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묶는 공통 분모이다.  작중 인물들의 의식이 과거와 현재를 옮겨다니는 동안 '두 시 반'은 각 인물들을 현재의 사건

(의사의 장례식)으로 강제소환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두 시 반'은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이 썩은 잎(바나나 회사-제국적

자본주의 상징) 이 가져왔던 과거의 번영을 계속해서 복기하며 썩어가는 상황(부패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의사의 주검과 동일)에 대한 현실인식을 상징한다.  어쩌면 '두 시 반'은 대령의 가족과 마을사람들과의 대립 상황을

책을 읽는 독자에게 강조하는 장치로도 보이는데, 이 반복되는 시간의 언급은 독자마저도 가상의 마을 '마콘도'의

사건현장으로 소환하는 듯하다.  아마 '두 시 반'이 갖는 이러한 힘이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