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주제 사라마구>

<예수복음>

묭롶 2012. 6. 28. 21:43

 

  한때 교회를 다녔던 적이 있다.  네살부터 열여덟살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며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 속엔 내뱉지 못할 불편한 질문들이 쌓여만 갔다.  왜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원죄를 가진 죄인인지, 왜 성경은 여자를 남자보다 더 죄악시하는지

 

「나는 하나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하나님은 기뻐할 때도 기분 나빠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섭다는 것밖에.  ~하나님의 경멸을 받으며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려면 여자가 되어봐야 해,   」p374

 

, 왜 그렇게 전도를 하려고 하고 왜 천당에 가야한다고 하는지, 왜 계속해서 죄를 지을 건데 회개는 해야하는지, 꼭 착하게 살아야 하는건지, 왜 믿는 사람은 선하고 불신자들은 지옥불에 떨어져야 할 사람들인지..등.......

 

 신앙을 버린 이후에도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이후에도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줘서 죄를 짓게 만들었는지, 전능하신 분이라면 이미 그 결과 또한 예견했을텐데 그럼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든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없다. 

 

  좀 거칠게 결론을 애써 찾는다면 인간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행동에 있는게 아니라, 그들에게 창조자가 부여한 자유의지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무슨 규례와 계명을 무시했기에 로마의 통치를 우리 죄에 대한 정당하고도

필요한 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까.  주는 아실 것이오.  그래요, 주는 아시겠지요, 인간은

알지도 못하고 죄를 짓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하지만 왜 주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 선택된 백성을 벌하시지 않고 로마 군대를 이용해 벌하시는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주에게는 주의 계획이

있고, 또 그에 맞게 수단을 고르시는 거요.  그러니까 로마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만일, 그렇다면, 로마군과 싸우는 반란군은 주에게,

또 주의 거룩한 뜻에 맞서는 게 되겠군요. 」p247~248

 

  생각이 비약을 넘어 몇해전 중동지역으로 선교활동을 갔다가 현지 무장단체에게 납치되어 공개처형을 당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금도 심심찮게 위험 지역으로 선교활동을 나가서 현지민들에게 피랍되는 상황이 뉴스로 보도되곤 한다.  난 그런 소식을 듣게 되면 매번 과연 그들의 신이 그들의 순교와 희생을 기꺼워할지 의문이 들었다.  종교의 종류를 불문하고 역사 이래로 그 포교의 과정을 살펴보면 순교와 기적은 필연으로 보여진다.  신라에 불교를 들여온 이차돈의 목에서 하얀피가 나와 불교가 인정을 받았다는 기록처럼 종교는 순교의 피위에  씨앗을 뿌린다.  길을 걸어가다 개미를 봤다.  개미를 보면서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자가 있다면 그가 보는 세상은 내가 개미를 보는 느낌과 같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해보일지가 의문이다.  물론 인간은 다른 개체와 달리 창조자에게 아부와 구애를 구한다는 점에서차별이 있겠지만, 그건 인간들만의 착각일 뿐 절대자의 관심사와는 별개일지도 모른다.

 

  카톨릭에서 보는『예수복음』을 단적으로 포현한다면 그건 '신성모독'이다.   '신성모독'이란 글을 읽으며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형법에는 '친고죄'가 있다.  피해자가 직접 고소를 해야 형사상 사건접수가 가능한 강간죄나 모욕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책을 '신성모독'이라고 규정한 단체는 카톨릭이다.  나는 '신성모독'이라는 표현은 모독의 당사자가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자의 대리인들이 아닌 절대자가 그렇게 표현할 때 비로소 '신성모독'이란 표현이 정당성을 얻지 않을까. 

 

  아마 주제 사라마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해왔을거란 느낌이 들었다.  책 속에 말이 갖는 허술함을 묘사한 부분처럼 성경은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기록을 글로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확인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쳐 태어났고 지금도 다시 해석되고 다시 쓰여지지 않는가.  사라마구는 절대자의 말씀을 담고 있다지만 결국 인간에 의해 쓰여진 것임에 주목하여 그 해석을 '예수'라는 주제로 문학적인 방법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책을 읽다보면 모든 질문은 한 가지 질문이고 모든 대답은 한 가지 대답과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간 내 머릿속을 자리잡은 모든 질문들이 주제 사라마구의 글을 통해 대신 발화(發話)된 것처럼, 그는 그간 금기시되었던 말(질문)을 묶은 매듭을 잘라 자유롭게 그 말들이 가는 향방을 지켜보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 종교에 대해 얘길 꺼낸다는건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어 있고, 개인들 또한 포교를 위한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말을 꺼내길 조심스러워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처럼 벌거벗고 있는 치부를 내보임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카톨릭 특히 그중에서 기독교는 비난받는 것을 금기시한 결과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 뻣뻣하게 담겨있는 해부학 실험실의 표본처럼 되었다.  그 종교가 가진 경직성은 해부학 표본만큼이나 사람에게 질기고 뿌리깊은 혐오를 안겨준다.  주제 사라마구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하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종교적인 금기의 대상인 예수를 문학이라는 연금술을 통해 뻣뻣한 십자가에 못박힌 표본에서 끌어내려 하나의 살과 뼈가 있고 피가 흐르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우리 앞에 실체화한다.  

 

「내 아들아, 불만족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집어넣은 것이란다,

 ~하지만 인간은 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어 나의 여러 특질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내 마음속에 이런 불만족을 품고 있지, ~네가 네 역할을 해낸다면, 다시 말해서, 내가 내 계획 속에서 너를 위해 예비한 역할을 해낸다면, ~나는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우리가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 카톨릭이라고 브르게 될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옮겨가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는 거지. 

 당신이 당신의 계획에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역할이 무엇인가요.  순교자의 역할이란다.  내 아들아, 희생자의 역할이지, 그게 신앙을 퍼뜨리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최선의 역할이야.」p448~449

 

  개인적으론 사회, 문화, 종교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옷을 뒤집어 그 안에 솔기를 다 보여주며 그 옷이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그걸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속시원히 보여줬던 이 멋진 작가의 신작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