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주제 사라마구>

정의의 상대성

묭롶 2009. 7. 12. 21:37

 

  그리스 아고라에서 유래한 대의 민주주의는 공산권의 몰락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아직까지는 체제유지에 적합한 정치체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을 대표하는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과 반작용 사례들이 제시될 것이다.  특히 선거제를 통해 유권자의 과반만을 넘기면 되는 현 투표제도가 낳은 결과물인 당선인들의 면면만을 살펴봐도 반작용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과거로부터 정의는 누가 보더라도 명명백백하게 정당한 것을 '정의'라고 문맥상 규정해 왔다.  하지만 이는 다수의 공리를 위해 다수가 '정의'라고 규정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정의라는 미명하에 핍박받는 소수는 역사 속에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정의'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 그 다수가 '가진자'(힘, 금전, 권력)의 '정의'로 변해가고 있다.  다수의 공리를 위한 정의가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갈수록 소수의 가진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장치로 둔갑되어 소수가 다수를 핍박, 압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실명에 직면하여 인성을 잃은 인간군상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실명 사태 이후에 시력을 회복했음에도, 정치적으로 눈 먼 상태(우익정당의 정권획득)를 용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한계와 정의의 상대성을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원인불명의 실명이후 자연스럽게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실명에 처해있던 시간들을 암묵적으로 봉인한 채 일상생활을 살아간다.  실명이 전염되기 시작하자 최초의 눈먼자를 비롯하여 그와 관련된 다수를 격리 수용하는 조치 외에는 어떠한 대안 없는 무기력함으로 일관했던 우익정당이 다시 다수의 의석으로 정치권력을 되찾았고, 그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변화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시력을 되찾은지 4년만에 시행된 선거에서 83%의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하게 되자 정부는 당혹감 속에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이를 정부권력에 대한 전복시도로 받아들여서 원인을 분석하기에 이른다.  대량실명 사태에 직면하여 격리수용과 군대를 통한 감시, 통제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정부는 이번에도 비밀경찰을 통한 감시, 고발, 그리고 유권자 중 500여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감금, 압박, 심리 고문 등 갖은 강제력을 동원하지만 백지투표에 대한 원인을 찾지 못한다. 

  이에 정부는 수도에 있는 다수의 유권자들 대부분을 백지투표라는 범죄의 용의자, 즉 위험인물로 분리하여 수도를 버리고 타 도시로 정부 수뇌부 및 정부기관을 극비리에 이전시킴으로써 수도를 고립시키고자 한다.  경찰과 소방인력마저도 철수한 채, 도시를 버려두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과격분자들의 혼란으로 인해 도시는 약탈, 방화, 살인 등으로 괴멸될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 봉착하게 되면 백지투표를 했던 사람들이 정부권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도움을 요청할 것을 노린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예상과는 다르게 고립된 도시 안에서는 각자의 역할에 따른 협동과 분업이 이루어지고 오히려 범죄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다급함을 느낀 정부는 도시에서 청소부를 철수시키고, 폭탄테러를 통해 도시민들의 공포감을 자극하지만 이러한 시도마저도 평화적인 도시민들의 태도로 인해 무산되고, 오히려 고립되지 않은 도시에서도 이들에 대한 동조세력이 생기는 역풍을 맞게 된다.  정부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그때 내무부장관은 한 통의 고발 편지를 받게 된다.  4년 전 모두가 실명상태에 빠져있을 때 실명되지 않은 한 여자가 이번 백지투표의 상황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고발편지였다.  정부는 이 편지를 받고 백지투표 사태의 희생양으로 실명되지 않았던 그녀를 타겟으로 잡아, 비밀리에 경찰을 도시로 침투시켜 그녀의 주변을 정탐하고 정황증거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와 접촉한 비밀경찰은 그녀의 무고함을 확신하게 되어, 그녀를 보호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마저도 암살 당하고

그녀 또한 정부요원에 의해 저격당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실명으로 인해 인성을 잃고 짐승보다 못한 상태에 빠져 있던 그 때, 혹독하게 굶주렸음에도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그녀의 눈물을 핥아주었던 개 '콘스탄테' 또한 그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바로 주인의 부당한 죽음에 맞서 맹렬하게 짖던 개 '콘스탄테'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여자에게 잇따라 울려 퍼진 두 발의 총소리를 들었냐고 물을 수 없다. 

여자는 죽어 바닥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피가 플러 발코니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개가 달려 나와 코를 킁킁거리며 여주인의 얼굴을 핥더니,

목을 뻗어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또 한 발의 총 소리가 그 소리를 없앤다. 

그러자 한 눈먼 남자가 물었다.  무슨 소리 들었나.  총소리가 세 발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가 우는 소리도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가 우는 소리도 들리던데. 

지금은 그쳤어, 세 번째 총 소리 때문일 거야.  잘 됐군,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p428

  불합리한 권력의 전횡을 묵과하고 용인하는 눈먼 자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옳바른 부르짖음을 (개 짖는 소리로 )거부하는 우리 모두는 눈을 뜨고 있으나 눈먼 자들이다.  그리고 인성을 잃은 눈먼 도시에서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콘스탄테'의 의로운 울부짖음을 '총알'로 잠재운 인간들의 잔혹함이 그리고 그들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타인에 대한 압제와 고통을 정당시하는 상대적 정의의 냉혹함이 나를 몸서리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