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내가 눈으로 보는 세상은 진실일까?

묭롶 2008. 11. 24. 00:26

 

  주제 사라마구의 1995년작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과연 내가 살고 있고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 진실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실제의 몸은 인공의 캡슐

안에 갖힌 채 기계들이 주입하는 뇌파 자극에 의해 형성된 삶을 진짜 삶으로 믿고

생활을 하는 '메트릭스'의 삶이, 영화만이 아니라 나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눈을 통해 비쳐지는 사물의 상을 사고에 전달

하는 것은 뇌의 기능일 뿐 눈의 기능이 아니라는 깨달음, 즉 우리가 보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뇌에 저장된 기억소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개개인의 기억에 따라 같은 사물일지라도 필연적으로 100%의 진실이 아닌 사물에 대한 왜곡된 진실이라는 깨달음 또한 충격적이다.   

 

   어느날 차를 몰고 가던 한 남자가 빨간불에서 신호대기를 하던 중 갑자기 눈이 멀었다.  이 남자는 곧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집을 찾게 되지만, 이 갑작스런 실명증상은 아무런 이유없이 급속도로 전염되어 정부는 일차적으로 실명한 사람들과 실명자와 접촉한 보균자를 정신병원에 격리 수용시킨다.  실명자를 격리수용하는 과정에서 눈이 먼 안과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눈먼 남편을 돌보기 위해 눈먼 척하며 정신병원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격리수용된 환자들은 군인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인간적인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채(식량 공급, 식수, 위생 관련) 짐승과도 같은 삶을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에 적응해나간다.

  이후 전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식량공급이 불안해지면서 환자들을 갈취하는 눈먼이들의 집단으로 인해

정신병원에는 불이 나고 눈먼 안과의사와 그의 아내의 일행은 식량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미 장자는 나비의 꿈을 들어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내가 나비의 꿈의 꾸는 것인지'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혼란은 결국 생각의 주체인 '내'가 '나'를 어떠한 대상으로 인식해야 하는가라는 정체성 판단의 혼란에서 야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자신을 인식하는 창구역할을 하는 것이 '눈'이라면 이러한 정보를 조합하여 '본다'는

실제적인 행위를 불러오는 것은 '뇌'이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뇌'는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명이 곧 '나'의 상실을 가져온다.  사팔뜨기 소년은 정신병원에 격리수용된 후 한동안 엄마를 찾지만 곧이어 끊임없는 식욕과 식탐, 배설욕구외에는 어떤 사고도 하지않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눈먼 채 부상을 당해 죽지 않기 위해 약을 청하러 간 차를 훔친 눈먼 남자에게 상사가 한  「내 형제라도 할 수 없어.」p95  라고 말하며 경계선을 넘어온 환자를 총살할 것을 명령하는 데에서 상사가 눈을 뜨고는 있으나 그 또한 인성을 잃어버린 눈먼자들과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곧 그 또한 눈이 멀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다.

  가족관계 역시 실명 앞에서는 그 힘이 약화된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사라진 후, 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다.」p119

  눈먼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진채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한 행동만을 하게된다.  「사실 우리가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그 제 이의 살갗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으며, 제 이의 살갗은 너무 쉽게 피를 흘리는

원래의 살갗보다도 훨씬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다.」p241  생존을 위해 이기주의를 선택한 그들에게 타인은

경쟁자요, 방해자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눈'을 잃었지만 이로인해 인간다움을 잃게되는 현실에 적응해야한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하며 또 어느새 그런 삶을 받아들이는 자신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아직까지 인간인지를 되묻게

된다. 

~평생 이렇게 더러웠던 때가 있었을까.  동물이 되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구나.p134

  안과의사의 아내는 자신만 눈이 멀지 않아서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고통스러움으로 인해 차라리 눈이

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이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것, 특히 사람이기를 포기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녀 역시 눈이 멀어야 했다.p316

  하지만

그녀는 현실에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눈먼자들에게 베풀겠다고

결심한다.  "그들의 손목시계는 모두 멈춰 있었다.  태엽을 감아주는 것을 잊었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의사 아내의 시계만 움직이고 있었다.p105 

앞으로 의사아내가 환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보루가 될 것임을 알게해준다.  마지막까지 그녀와 함께 한 일행 중에도 아직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는 일행들이 있었다.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이제~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p27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실명증상이다.  보통 실명의 경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과 같은

어둠 속에 갇히는 증상을 보이지만 이 전염성 실명은 멀쩡하게 두 눈을 뜨고 있으나 온 세상이 환한 빛에

둘러쌓인듯한 백색어둠이다.  책에서는 흡사 우유 속에 잠긴 듯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보통 정상인의

경우에도 너무 밝은 빛에 노출되면 잠시동안 시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최초에 눈이 먼 남자가 다시 눈이

보이게 되고, 안과의사도 눈이 보이게 되자 그의 아내가 했던 말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p461  눈을 뜨고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눈을 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는 주제 사라마구의 경고의 음성이다.  그 속에 숨은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고 보여지는 진실마저도 왜곡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내 눈이 보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눈먼 자들은 애기한다. 

「내가 만약 눈이 다시 보이게 된다면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볼 거에요.  '눈'은 곧 상대방을 의미

하니까요.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어떤 의미를 보려고 노력할 거에요.」

'눈'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눈을 통해 들어온 사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왜곡이

있을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조직을 구성하고 책임지는 사람, 즉 정치인에 대해 그들이 눈을

뜨고는 있으나 가장 눈먼자라고 말한다.  한 개인의 사고가 갖는 왜곡의 범주는 그리 크지 않으나, 그 왜곡이

정치인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의 일파만파에 대한 경계를 하는 것이다.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에요.p419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비춰지는 정치인들은 눈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신들의 눈 앞에서 치우기에

급급하다.  실명자와 보균자들을 격리수용시키고 지시를 불이행하는 사람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총살해버린다.  그런 언론을 통제하여 정부가 실명사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며 설득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 너무도 닮은 꼴인 이러한 정치현실을 보며 실제로 국민들이 눈을 뜨고 있으나

밝은 빛에 휩싸여 실상은 보지 못하는 눈먼 저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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