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신경숙>

<모르는 여인들> 글의 온도 36.5 ℃

묭롶 2011. 12. 16. 21:48

 몇년 전 엄마와 친정식구들이 모여서 명사십리로 해수욕을 갔었다.  나는 해수욕을 하며 거센 파도에 세번 쓸려들어가 파도속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한 번 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바닷물을 연신 들이키고 눈, 코, 입으로 바닷물을 고래처럼 내뿜으며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접선했다.  대여한 검은 튜브를 간신히 끌고 모래사장으로 탈출하는 와중에도 파도는 연신 내 등짝과 종아리를 후려쳐서 휘청이게 만들었고 겨우 기진맥진 탈출한 내 눈에 띄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그때, 튜브를 끌고 신나게 바다로 달려들어가는 중이었다.(흡사 진격을 알리며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장군처럼)  난 모래사장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던 여동생에게 "엄마, 바닷물 안드셨냐?"고 물었다.  술을 마시느라 진즉에 해수욕을 포기한 여동생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왠걸, 제부가 보니까 엄마가 잠수를 벌써 네댓번은 하셨다는데,,,,, ."라며 나의 초췌한 몰골을 올려다봤다.  "그래?  그런데도 저렇게 물 한 번 안 먹은 사람처럼 신나서 바다로 들어가신데?"       

 

  엄마의 물놀이는 온 가족이 입술이 퍼래져서 덜덜 떨며 모래위 돗자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엄마는 지금도 그날 했던 물놀이가 제일 재미졌다고 말씀하신다.  "엄마, 물 먹고 정신이 하나도 없든만 그게 그리 재미지든가" 라고 물으니 바로 그게 재미라고 답하는 엄마 앞에서 난 할말을 잃었다.  사는 것도 그랬다.  난 매사에 비겁하고 핑계가 많고 포기가 빨랐다.  내가 이런 나를 안다고해서 적극적으로 나를 개선하여 삶을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이십대가 나를 알아가고 나라는 사람에게 적응하기 위한 시행착오였다면, 나의 삼십대는 나라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가기 위해 자학하고 좌절했던 시간들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나는 서른이 지난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생각했다.  

~매일매일이 막연했고, 불안했고 때로는 절망스러웠다.  ~내가 이제 소의 나이를 

살고 있나?~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관계에 몰입할 일은 없겠으나 짐승들이 보태준 

나이를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며 오래 살 것 깉은 느낌이 들곤 한다.」

p 254~255 「모르는 여인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싫었고 나를 받아들이는게 너무 힘들었다.  사실은 혐오가 치밀 정도로 싫으면서도 이해관계 때문에 계속 생활해야 하는 타인처럼 나에게 나라는 존재는 이물감과 힘겨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꾸역꾸역 억지로 먹는 밥처럼 먹었던 나이가 서른 중반이 되면서부터 조금은 수월해졌다.  나는 이제 마흔이 가까워지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먹는다는 행위는 소화되어 에너지로 사용되고 소진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이가 우리의 인생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또 어떻게 소진된다는 것일까?  살면서 힘이 들때마다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렀고 그 시간을 견뎌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가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내가 견뎌야하는 시간의 무게를 덜어줄 순 없었다.  

 

  인간의 체온은 보통 36.5℃이다.  이 온도의 물에 손을 넣어보면 온기가 느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약간은 싸늘한 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추운 겨울 사람끼리 서로 맞닿아 있으면 그 36.5℃라는 온도는 동사를 막아줄 정도로 따뜻한 온기를 제공한다.  만약 글에도 온도가 있다면 신경숙의 글의 온도는 바로 사람의 체온과 같은 36.5℃일 것이다.      

  

~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체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저지르는 숱한 오류와 뜻밖의 

강인함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나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중 p 283 

 

  그녀의 이번작품을 읽으며 은연중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된다.   나보다 일곱살이 많은 그이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의 글 속에 등장하는 여성화자들도 작품을 거듭하며 나이먹어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실상 그녀의 이번 작품 『모르는 여인들』에 등장하는 화자들읕 실상 '모르는' 여인들이 아니라 '모르는' 사이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나의 고통(『외딴 방』)은 너(『엄마를 부탁해』)의 고통이 되고 또 우리 모두(『모르는 여인들』)의 아픔이 된다.      이러한 고통의 확산과 전파는 고통 앞에 오롯이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원적인 아픔에 보내는 연민이자 이해이다.  작가 신경숙의 글이 가진 36.5℃의 온도는 고통을 안고 사는 인간에게 위로를 전하는 대신 기댈 수 있는 등을 내어준다.  

 

「나는 여자 앞에서 조금도 말을 더듬지 않고 잘잘잘 어머니와 외삼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음식을 먹는 데 언제 장애를 느꼈었냐는 듯 얘기를 하는 도중에 

호박잎쌈까지 싸먹고 있었다.」p 73 「화분이 있는 마당」

 

 「 ~아무렴 어떠랴, 하면서도 내가 처음 했던 말이거나 내가 분명하게 발음했던 

말이 하필 '엄마' 배고파,였다고 생각하니 좀 서글퍼졌다.  나는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옮겨적기를 미뤄두었던 창이 보낸 마지막 결별편지를 노트에 한 문장 

한 문장 옮겨적었다.  어쩐 일인지 나에게 말하기와 밥먹기의 장애를 일으키게 

했던 느닷없는 창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p 80 「화분이 있는 마당」

 

  작중에 나오는 '여인'들은 '모르는' 여인들이지만 내가 겪었던 시간만큼의 무게를 저마다 감당해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네들은 누군가에게 섣불리 손을 내밀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정성들여 차린 밥상을 내어주며 말없이 손에 수저를 쥐어준다.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가 억지로 사약먹이듯 나이를 떠먹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앞에 차려진 나이 앞에 왜 그리 나약하고 힘들었을까?  넘기기 힘든 덩어리는 오래오래 씹어야하는데, 그냥 한꺼번에 삼키려하니 목에 걸려 한참을 켁켁거리며 고생하고 미련하게 자학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몫으로 놓인 시간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서른여섯해가 걸렸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이를 먹어감의 의미를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그녀의 유년의 자취와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흔적, 그리고 여자로서의 그녀............등.........자신이 먹어가는 나이의 무게를 담백하게 딱 그 무게만큼의 힘으로 지탱할 수 있을 정도가 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자신감과 여유를 그녀의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담담한 어체를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고 위로받은 느낌이 들었다.  약육강식과 타인과의 경쟁논리만을 부추기는 세상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신경숙은 글로써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