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모든 사람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

묭롶 2008. 11. 18. 23:27

 

 

  <외딴방>에서 짚더미 속에 숨어 오빠가 사준 인어공주를 읽고,  열여섯의

어느 날 오후에는 오빠에게 자신을 서울로 데려다달라는 편지를 쓰다가 찢어

버리고는 나가서 자신의 발등을 쇠스랑으로 찍어버린 그녀에게 '독한것' 

한마디를 내질렀던 엄마, 그리고 자신을 서울의 오빠에게 데려다주는 기차에서

낮동안의 고된 노동에도 졸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던 엄마의 눈, 새삼스레

그녀는 자신의 엄마의 눈이 저런 모양새를 갖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열여섯의 그녀가 여름날 자신의 발등을 찍어버렸던 쇠스랑을 우물에 던져

버린 후 우물은 시멘트로 메워졌지만 그 우물 속의 쇠스랑은 그대로 남아

그녀는 그 시멘트 길을 볼때마다 우물이 밑에서 흐르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작가는 "작가가 되면 꼭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라며 인터뷰에서 밝혔다.  우물 속의 쇠스랑이

작가의 의식 속에 사라지지 않는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면 작가의 가슴 속 우물에 잠긴 엄마를 건져

올리는 일은 한 평생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위한 고해성사일 것이다.

 

  그녀는 <엄마를 부탁해>에서「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를 첫머리로 엄마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책은 총 네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는데, 작중에서 화자는 큰딸, 큰아들, 아버지, 그리고 엄마의

차례로 화자가 바뀌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화자가 바뀜에 따라 엄마에 대한 다른 기억들이 되살아나

다시금 엄마를 알아가게 되고 소설 속 화자들은 그에 비례하여 사라진 엄마에 대한 아픔들이 커져만 간다. 

언제나 자신들 삶에서 항상 나중이었던 엄마의 일생은 실종을 계기로 가족들의 기억 속에 반추되는 것이다. 

  엄마이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도 의식하지 못하고 때론 의식을 했지만 그냥 일상에 밀려 잊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자신들로부터 엄마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는 뼈아픈 자각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강렬하다.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내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거야.~언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어」p260

「너는 늘 짧게 대답하곤 했다.  엄마가 더 물으면 귀찮아져서 나중에 애기해줄게, 엄마!  그랬다.

너희 모녀에게 나중에 다시 그런 애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네 앞에는 늘 다른 일이 놓여 있었으므로」p275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엄마를 실종을 통해 실제로 잃어버리기 전에 이미 잊고 있었다고....

'잃는다' 와 '잊는다'가 실제로 같은 말이라고...  그들의 삶 속에서 잊혀진 엄마는 그 무게감을 상실하고

대중 속으로 존재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특이하게도 2인칭의 시점('너')이 쓰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엄마를

찾는 가족들에게 했던 말 '어쩌다가 엄마를 잃어버렸을소?'라는 물음을 함께 하며 관찰자였던 독자는

책을 읽어나가며 자신도 사실은 '엄마를 잃어버린'(엄마를 잊어버린)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독자자신이

곧 소설 속의 화자의 위치로 전환되게 된다.  그래서 독자가 화자가 된 이 소설에서 ('나')는 곧 ('너')가

되는 것이다.  소설 속의 엄마를 결국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49제를 치르는 동안 이승에서의

모든 연을 풀고가는 영혼처럼 아픈 자식들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떠난다. 

  소설 속 엄마는 4장에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반전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바로 엄마가 아닌 '박소녀'로

살았고 꿈꾸었던 삶이 있었음을 조심스레 말한다. 

 

「미안하구 미안허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랬고, 얼마 후엔 그래선 안될 것 같아 그랬고, 나중엔 내가

늙어 있었소이.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신 앞에선 기품있어 보이고 싶었네.」p234

 「사줄 테여?  말 테여?  날씨 따뜻하잖어요.  밍크코트 입을 일이 있어요?  있어.  어디 가세요?  안가.~

비관적인 생각이 들면 장롱을 열고 밍크크트에 얼굴은 묻어보곤 했제.」p244,245

 

  자식들을 둘러보고 자신이 살던 옛집을 둘러본 후 엄마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자신이 태어났던 곳,

즉 자신의 엄마가 있던 진뫼의 오두막이었다.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얼굴을 들고 나를 보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p254

 

  일평생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자식들에게 잊혀지고 결국엔 자신마저 잃고선 파란 슬리퍼가 발등을

쓸려 발등의 뼈가 드러나도록 지난했던 세월을 보냈던 엄마에게 결국 돌아갈 곳은 바로 '엄마'였다.

에필로그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큰딸이 성베드로 성당에서 피에타상을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비탄에

잠긴 마리아 성모상) 보며 큰 위로를 받고 했던 말 '엄마를 , 엄마를 부탁해'는 이미 엄마를 되찾기에

늦어버린 이 세상의 모든 불효자들이 내는 억눌린 울음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