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묭롶 2010. 7. 13. 21:30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체취나 말투 같은 개성을 갖고 있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는 작품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작가의 성품이나 성격을 느끼게 된다.  신경숙의 작품은 <겨울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고백체의 담담한 어투를 유지하고 있다.  흡사 새벽에 홀로 일어나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걸어갈 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처럼 그녀의 문장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얼려버린 내 마음에 돌을 던진다. 

 

  책 속에서 크리스토프가 삿대에 의지해 강물을 건넜던 것처럼, 사람들은 살아가며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갈 삿대를 찾으려 한다.  그 삿대가 누군가에게는 글쓰기(정윤)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림(단)이며 누군가에게는 운동(미래누나, 이명서)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가 되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크리스토프)가 되는 순간은 바로 너와 나의 고통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누군가 전화를 하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고통까지도 떠 안으려고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먼저 솔직해져야만 한다.

 

  아마도 작중인물 '이 명서'와 '정 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그 이상의 관계를 꺼렸던 이유(8년간의 헤어짐)도 결국은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힘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통을 자각하는 삶과 고통에 둔감한 삶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고통을 자각한다는 것은 바로 상처받고 아픈 나를 직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고통에 다가가고 이를 치유하고자 노력함을 포함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고통에 둔감해지려는 노력들은 과거의 고통을 애써 잊고 앞으로 내디딜 한발자욱의 힘을 비축하는 노력을 포함한다.  똑같이 인생이라는 강을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건너는 그 곳에서의 악전고투는 모두 제각각이겠지만,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도 묵묵히 견디는 사람도 분노하고 원망하는 사람도 모두 고통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고통 앞에 솔직해질 수 있을까?

 

  현실속에서 고통을 드러내는 행위는 나태함과 무능력, 사회성 부족으로 비춰지기 싶상이다.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지 않으며, 타인의 고통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친분관계에 의해 고통을 털어놓을 때일지라도 사람들은 자기스스로를 검열하며 나약한 자신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다모의 대사)란  극중대사도 있었지만, 요즘 우리들은 "아프냐. 나는 안 아픈데.ㅋㅋㅋ" 이러거나 "아프냐. 그런데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이런식은 아니었을까?  갈수록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된다는 일이나 누군가의 고통을 떠 안으려 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세태속에서 정체성을 정립해야하는 젊음의 '혼란(방황)'을 신경숙 작가는 고민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새벽 3시에서 오전 9시까지의 고요한 시간(남들이 모두 잠든)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또 고백하는 마음으로 써내려 간 듯 보이는 글의 체취 속에서 그 미칠것같은 혼란이 조금은 가라앉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P157 

「이렇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이 다가올까.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P210

 

   이 책은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처럼 인생이라는 강에 가라앉지 않고 고통을 짊어진 채두려움에 맞서 계속해서 걸어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똑같은 강을 건너는 자(크리스토프)로서의 동질감과 위안을 얻게 해 준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들이네.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자들이기도 하지.  거대하게 불어난 강물 속에 들어가 있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란 말이네.  강물이 불어났다고 해서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제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P63

 

    책 속에서 윤교수는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싸안아 준다면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거미를 무서워했던 '단'이나 언니의 죽음에 대한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루'의 고통은 어찌보면 어린시절 '단'이와 '윤'이 계속해서 따라갔던 물결들 만큼이나 개별화된 고통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딘가에서 흘러왔는지 알 수 없는 물결들이 한데 모여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의 고통 앞에 우리 모두는 공동의 운명체(크리스토프)일 수 밖에 없다. 

 

「눈을 털어주게.  여기서 겨울을 지내보니 이 상태에서 내일 또 눈이 내리면 이 나뭇가지들이 견디지 못하고 뚝뚝 부러질 거야.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자네들과 내가 눈을 털어주세.」P342

 

  그대로 두면 눈의 무게에 휘어 부러질 가지를 흔들어서 그 무게를 덜어주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인가?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의한 이해가 아닐까?

옳다고 판단했던 일들은 왜 애초의 생각대로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과연 그때 이렇게 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까?  책 속의 인물(이명서, 정윤)들이 했던 이 물음표들이 어느새 나에게 되돌아와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대답은 한참 후에 하게 될 것만 같다.  작중 인물 정윤의 말처럼 '언젠가는. 언젠가는 블로그에 답을 쓰게 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PS: 작중인물 윤미루의 책상과 침대 사이에 걸려있는 그림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다.  왠지 보고나니 얼마전 종용됐던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신세경과 최다니엘이 함께 오랫동안 응시했던 '마지막휴양지'가 떠올랐다.  왠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두 그림을 보며 공통점을 느꼈다면 그건 나만의 생각일까?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스위스 바젤 미술관 소장>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라스트 리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