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어요

예술과 광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 <블랙스완>

묭롶 2011. 3. 2. 11:11

 

 2월28일 만삭의 나탈리 포트만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60센티미터의 키에 40킬로에 못미칠 정도로 감량을 해가며 1년동안 하루 5~8시간을 발레연습을 했다는 그녀를 보기 위해 3월1일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넘치는 긴장감과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에 화면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 온전히 발레리나 니나 세어스였다.  영화가 끝나고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흡사 청자에 하늘빛을 담아내기 위해 스스로 가마불 속에 들어가 자신을 불살랐다는 고려시대 도공의 모습을 보는 듯  그 청자빛에 매혹되면서도 왠지 서글퍼지는 기분이었다.  

  전율이 일 정도로 완벽하게 스완퀸을 소화해낸 나탈리 포트만의 노력과 집념이 극중 완벽을 위해 자기자신의 경계마저도 지워버린 니나의 모습과 닮아있어서 두려움마저 들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떠올리게 된다.  평생을 고통과 가난 속에서 살다가 37살의 짦은 생을 권총자살로 끝낸 고흐가 남긴 그림들처럼 극중 니나의 공연장면은 그의 그림들만큼이나 눈부시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극중에서 총감독은 정해진 역할내에서만 완벽하게 연기하는 니나에게 자신에 대한 통제를 풀 것을 요구한다.  니나는 그런 그의 요구에 혼란스럽다.  

  어렸을때부터 엄마가 정해준 정체성(sweet honey)을 자신의 경계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 경계를 넘어서라니,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허락받지 못했던) 그 너머의 세계가 무엇이며 자신이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다.  

  인형놀이에서 공주를 맡은 인형처럼 그저 그녀에게 닮아야할 모델(욕망의 대상)이 있다면 그건 극중 베스일 뿐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동경하던 베스의 파멸을 통해 자신의 마지막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초조를 겪게 되고 그러한 심리가 환상의 형태로 나타나며 정신분열의 상태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종이 한장 차이라고 말한다.  이에 부연하여 일반적인 생활인들도 어떠한 기재나 요인에 의해 비정상적인 행동이 촉발되기도 하며, 그 비정상의 상황을 인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사이, 다시 정상적 생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행동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이 될 경우 정신병리학적인 징후를 드러내게 된다고 말하는데, 비정상을 병리학적 징후로 표출시키는 기재 가운데, 주요한 요인으로 희박한 자아정체성과 일관성없는 애정관계를 꼽는다.

  <블랙스완>에서 스완퀸의 캐스팅은 니나의 이상증상(환각:극중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출혈은 니나의 인격의 균열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여진다)을 촉발시키는 기재가 된다.  또한 엄마가 니나에게 주입하는 역할놀이는 니나의 자아정체성을 약화(자신을 예쁜아가라고 부르는 엄마가 이상하다는 릴리의 말에 반문하는 니나)시키고 그릇된 애정(집착과 애증의 교차)관계는 병리학적촉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기존에 엄마의 인형에서 '베스'로의 투사와 동일화를 거쳐온 니나의 정체성은 스완퀸 캐스팅과 베스의 사고 이후, 정상과 비정상(거울과 꿈을 통한 반복적 환각)의 혼란을 겪게되자, 자아를 상실하고 극중 역활인 스완퀸백조(흑조인 동시에 백조-스완퀸이라는 배역 자체가 이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지움을 무너드리는 이중성을 지닌다)로의 인격전이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극중 왕자는 마법사로 변하고 현재의 니나(감독을 유혹하려는 흑조)로 인해 현재의 또 다른 니나()는 극중 배역처럼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극중 니나의 인격의 소멸과정과 죽음은 반고흐의 죽음과 닮아있다.  극중 아이의 임신으로 발레리나를 포기한 후 태어난 아이에게 자신의 이상을 주입시킨 그녀(니나에게 계속해서 넌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할거야-니나 엄마의 강박증을 상징)는 딸이 커감에 따라 자신과 딸의 경계를 구분짓지 못한 채, 자신에 대한 애증을 그대로 딸에게 투사를 하게 된다.  반 고흐의 어머니는 아들을 사산하게 되자 다음에 태어난 아이를 죽은 아이의 이름 '빈센트'로 부르며, 죽은 아들의 대역으로 여긴다.  빈센트를 키우며 그 어머니는 죄책감과 애정의 교차 속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게 되고 반 고흐는 약화된 자아정체성 속에서 평생을 애정(어려운 처지에 처한 여성이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일방적인 애정을 갈구하는)에 굶주린 채 살아가야 했다.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강렬한 색채와 굵은 터치, 그리고 곡선들은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 속에서나마(그래서 자화상을 많이 그렸을까?)붙잡고자 했던 그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술이 극중  감독인 토마스의 말처럼 경계를 넘어선 놀라움의 세계(그 이전에 보지 못했던 창조물)의 산물이라면 그 산물의 창조자들 또한 일반성(정상)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  기행과 일탈, 광기가 예술가를 규정하는 특성이 된 까닭이 이러한 예술적 창작물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창작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짐작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