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보다 먼저였던 적이 있었을까? 언제나 나는 피곤했고 엄마를 찾는 건 내가 아쉽거나 내가 여유가 있을 때 뿐이었다. 어쩌다 엄마와 영화라도 보게 되면 난 괜히 큰 시간이나 공력이라도 할애한 듯한 뿌듯함을 앞세우곤 했다.
그나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는 아에 엄마는 신경도 쓰지 못했고 그런 나를 피곤하다는 이유로 정당화 하던 차에 3월 1일, 선배언니와 영화를 보고 마트를 다녀왔는데, 둘째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냐! 나 XX가 병원에 입원해서 그러는데, 거기 간 김에 집에 들릴께"
-나 "야.. 오지마, 나 피곤해 죽겄어, 자야돼"
"아따.. 잠깐만 가께"
-나 "그럼 들렸다만 가"
온다던 동생이 오후 6시가 다 되도록 함흥차사였다. 잠은 계속 오는데, 언제 올지 몰라 기다리려니 짜증이 났다.
-나 "어디여? 온대매 으째 안와?
"엄마, 모시고 가느라고...."
-나 "엄마도 오셔?"
"오매가 언니 한달이나 못 봤다고 보고 잡단가"
그제서야 잠을 좀 자고 나니 시간이 8시가 넘어 있었다. 머리가 좀 맑아지니 오랜만에 딸내미 얼굴보겠다고 오셨다가 그냥 가신 엄마가 맘에 걸렸다. 동생한테 전화를 해서 잘 모셔다 드렸냐고 물어봤더니, 언니네 집에 가서 출산용품 장만한 것도 구경하고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냥와서 서운해하셨다고 답했다.
에횽.. 그 얘길 듣고 맘이 안 편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4일은 건강검진 예약해놓아서 3일 저녁부터 금식하셔야 하니까 2일에 같이 저녁드시고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언뜻 안 내키는 듯, 거절하셨다가 딸내미랑 오랜만에 시간을 보내고 싶으셨던지 그러마고 하셔서 2일 저녁에 우리 사무실로 오시는 걸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2일 점심때, 사무실 옆에 위치한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저녁 6시 30분 프로를 예매하고 퇴근시간에 맞추느라 업무를 부랴부랴 서둘러서 끝냈다.
엄마는 이미 5시 25분에 도착해서는 옆 건물 계단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들어와서 기다리지 그랬냐는 타박에 그저 웃기만 하셔서, 저녁은 뭐 드시고 싶냐고 도가니탕과 소머리 국밥을 권해 드렸더니 국밥을 드신다고 했다. 소머리 국밥 특으로 시켜드렸더니, 연골이 듬뿍 든 국물을 뜨시면서 콜라겐이 많이 들었겠다며 좋아하셨다. 평소 테이크아웃 커피를 좋아하시는데, 요즘 잠을 잘 못주무신다고 첫째 동생이 사드리지 말라고 미리 연락이 온 터라, 코코아를 사 들고 극장으로 향했다.
엄마의 취향은 끝내주는 액션과 스펙터클쪽이었는데, 최근들어 자막나오는 영화를 좀 힘들어하셔서 영화 별 평점이 높은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선택했는데, ㅎㅎㅎ 왠걸 욕쟁이 할아버지(이순재)가 나온다. 눈이 쌓인 길을 고물 오토바이를 몰고 새벽 우유배달을 하는 김만석 할아버지(이순재)를 보며 엄마는 본인이 얼마전까지 배달하던 우유구역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군봉 할아버지의 배우자로 출연한 치매노인역의 김수미가 얼굴과 온몸에 크레파스 칠갑을 한 모습으로 화면에 나오자 엄마는 김수미가 저런 역할로 나올 줄 몰랐다며 웃으셨다. 치매걸린 아내를 수발드는 군봉 할아버지(송재호)를 보자, 대장암 수술을 두번이나 해서 엄마를 십년동안 병수발 들게 했던 할머지가 떠올라서 아차 영화를 잘못 골랐구나, 싶었는데 정작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신나게 깍두기에 국밥을 먹고 에잇... 왜 이렇게 슬픈거야 이러면서 안울려고 막 참다가 콧물만 하나가득 되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안 운다고 잘 참았는데, 눈이 토끼눈이 되어 있었다.
밝고 신나는 내용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괜히 엄마 힘들었던 과거만 잔뜩 떠올리게 하는 영화를 봤다 싶은 생각에 엄마 눈치를 살피는데, 정작 엄마는 오랜만에 좋은 영화봤다며좋아하셨다.
문득 엄마 인생에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메, 언제 제일 행복했어?"
뜬금없는 내 질문에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엄마는
"지금이지야. 너랑 있는 지금이 젤로 행복하다."
괜히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프지마, 나 맛있는거 오래오래 먹고 싶으니까 절대 아프지도 말고 좋은 할배 있음
연애도 해"
ㅎㅎㅎ 오메는 별소릴 다 한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3월 4일 건강검진을 위해 엄마는 대장 내시경 액을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삼십분 간격으로 마셔야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병원에 모시고 가기 위해 친정집에 들려서 문제의 4리터 분량의 내시경 액 통을 보자, 보기만 해도 토가 쏠렸다. 묵묵히 요령없이
그걸 시킨대로 다 마시면서 엄마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까봐 쓰레기통을 옆에 놓고 마셨다고 했다. 물론 병원에서는 검사를 하면서 액을 너무 잘드셔서 깨끗하게 잘보인다고 칭찬을 했지만.......
오후 12시 30분에 병원에 도착해서 기초검사(혈액검사, 소변검사, 혈압측정, 시력검사, 체성분검사 등)을 하고 유방정밀 초음파와 내시경을 한 다음, 자궁 경부암 검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대장내시경을 했다. 평일 오후 시간대를 택해서인지 그나마 검진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검진을 할 수 있었지만, 엄마 혼자 검진을 받기에는 힘이 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 내시경을 하며 장에 가스가 많이 주입이 됐던지 엄마는 30분 가량을 검사대에서 못 일어났다. 배가 너무 빵빵해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고 했다. ㅎㅎㅎㅎ
뒤에 대기자도 없고 이런 저런 얘길 하며 엄마 장에서 빠져나오는 가스 소리에 배꼽 잡고 웃어댔다.
검사가 다 끝나고 대장내시경과 유방초음파는 결과가 바로 나온다고 해서 내과에서 원장과 면담을 했는데, 울 엄마는 자궁 초음파도 문제 없고, 유방, 대장도 이상이 없이 깨끗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ㅎㅎㅎㅎ 검사 받는거 힘들다고 안한다는걸 억지로 월차내서 모시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비는 17만원 정도가 나왔지만, 울 오메가 건강하시다는데 돈이 문제겠는가..홀가분한 마음으로 엄마와 병원 근처 죽집에서 전복죽을 시켜서 사이좋게 나눠먹고 엄마와 친정집으로 가면서, 힘든 하루였지만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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