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알베르 카뮈의 1931년부터 1934년까지의 글들이 실려있다. 그 글 속에서 작가의 길을 걸어가려는 그의 모습과 자의식의 정립과정 그리고 이후 작품들의 잠재태를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그 시기동안의 글에서 보여지는 문맥과 이미지들은 이후 작품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차용되고 삽입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이 땅을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지만, 내가 햇빛 아래서 맛본, 모든 것을 다 손 놓게 하는 이 황홀감에 비길 만한 것을 과연 다른 어떤 곳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지칠대로 지쳐버린 도취, 이 열광적인 실신 상태, 이 충만감, 세찬 물결과도 같은 빛을 끊임없이 쏟아 붓는 이 하늘의 자비로움」p120~121
-> 이글은 『이방인』에서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에 취해 무의식중에 살인을 저지르는 뫼르소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이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이방인』P87~88
<가난한 동네의 목소리들> 1934년
「그녀의 불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고약하고 어리석은 남동생과 같이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P197
->『행복한 죽음』1937년 집필-「그는 귀머거리에다가 반벙어리였고 심술궂고 사나웠다. ~하지만 그녀의 동생은 누이가 애인을 맞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P89~92
또한 1931년에 쓰인 <어느 사산아의 마지막 날> 첫 머리에 쓰인 「나는 휴가를 보내던 호텔 방의 어떤 서랍 속에서 이 원고를 우연히 발견했다.」->이 글에서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감방의 오래된 매트리스 속에서 발견하는 잡보 기사나 『페스트』에 삽입되는 아랍인 살인사건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글』을 통해 카뮈가 한 사람의 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과 독서가 그에게 미쳤던 영향, 그리고 작가로서 성장과정에 함께했던 그르니에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가 전사한 후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전기도 수도도 없는 외할머니의 아파트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카뮈는 폐병이 발병한 이후 요양을 위해 이모부 아코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모부 아코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카뮈에게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그르니에는 카뮈에게 여러 권의 책들을 권해 주었는데, 그중 앙드레 드 리쇼의 <고통>이라는 책은 카뮈가 자신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보여주었다. 카뮈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현실과 자신의 이상과의 부조리를 글로 표현함으로써 얻게되는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고통>의 독서를 통해 카뮈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방법론으로써 현실의 재해석인 문학을 선택했음을 <음악에 대한 시론>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음악에 대한 시론>1932년
「인간의 모든 삶은 그 목표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달성하는 단 하나의 수단은 바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술은 오직 "의지의 객관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볼 때, 이 "이데아의 세계"를 드러내는 특별한 인식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예술의 기원은 이데아의 인식이고 예술의 목적은 이 인식의 전달이다. 예술은 인간의 영혼의 지배력, 삶의 지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들 중의 하나다.」p48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문학이라는 방법론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다양한 문체적 실험과 모방(시인 베를렌의 시를 모방한 초기 시들)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러한 문학적 시도들은 이후 그의 작품들의 핵심을 이루게 되는 '부조리', '반항'에 대한 중요한 결과물을 도출시켰다.
<용기> 1933년
「다만 장례식 날, 모두가 다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도 덩달아 울었지만, 울면서도 고인 앞에서 솔직하지 않은 가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p127
-> 『이방인』에서 어머니의 죽음 앞에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던 뫼르소의 행동에서 이후 카뮈 작품의 핵심적 요소인 '부조리'의 잠재태를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베를렌>1932년
「나는 결점들과 약점들을 가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약점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섬세하고 상처투성이인 그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비열함과 반항을 함께 지닌 한 인간으로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으로는 신에게 기도했고 머리로는 죄를 저지른 인간 말이다. 」p26->『전락』의 클라망스
<직관들> 1932년
「어느 길모퉁이에서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는 내가 눈 앞에서 흔히 그 행동을 지켜보곤 했던 나의 그 "자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마침내 관객과 배우를 이상과 무한의 동일한 욕망 속에 통일된 하나로 만들어놓았으니까 말이다.」-> 『전락』의 재판관겸 참회자-클라망스
드디어 1933년 작가수첩의 전신격인 독서노트가 등장하고 그 이후 「무어인의 집」이 발표되었다.
<무어인의 집>과 <지중해>에서 이후 그의 작품 속 배경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지중해와 알제의 풍경, 그리고 용되는 이미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지중해>1933년
I
창 유리의 텅 빈 시선에 아침은
푸르게 빛나는 모든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데 -<어느 사산아의 마지막 날>이후 삶에 대한 카뮈의 인식은
어제 죽어버린 자아(과거)와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
현재가 과거인 죽음이 되기 전까지 죽음에 자아가
반항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발코니에서는 노랑, 초록, 그리고 빨강의 커튼들(무어인의 집)이 흔들린다.
팔을 드러낸 처녀들이 빨래를 넌다.
한 남자, 손에 안경을 들고 창가에.
에나멜을 입힌 듯 바다엔 맑은 아침빛,-지중해의 바다는 무수히 죽어버린 과거와 치열하게 부딛치는
현재가 뒤섞이는 자아의 공간을 상징하는 듯 하다.
백합 같은 빛을 띤 라틴적 진주인
지중해.
II
미동도 않는 뜨거운 바다위의 정오가- 여기에서 정오는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으로 강렬한 태양빛
아래서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지중해의 바다 앞에 현재의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소리치지 않고 나를 받아들이니 침묵과 미소.
~너를 부정했기에 긍정하는 목소리들! -그렇기에 정오의 시간을 거쳐 얻어내는 것은 나에 대한 인식이다.
~지중해여!
확신이 출렁이는 푸르른 금빛 요람.(부조리한 이미지, 언제나 푸르른 바다와 이미 태양이 빛을 잃어가는 쇠락의 이미지의 대립-또 다시 죽음(과거)으로 가는 현재를 지켜보는 자아)
III
저녁이 올 때 저고리를 어깨에 걸치고 그는 열린 문을 잡고 서 있어-저녁이 와도 이미 자신을 인식하게 된
자아는 시간에 굴복하지 않는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낀다(『행복한 죽음』에서
자그뢰스와 파트리스가 웃으며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게
된다.)
불꽃의 그림자가 핥고 있는 그 남자, 자기의 행복 속으로 들어가서 어둠 속에 녹아든다.
~
IV
그리고 곷, 또 그다음에, 이빨들,
푸르고 빛나는 이빨들.(석양(죽음)에 저항하는 반항의 의지)
빛! 빛! 인간은 그 빛으로 완성된다.
태양의 가루, 무기들의 광채,
너에게서 세상들이 반들반들 다듬어지고 인간화되도다!
지중해여, 오! 지중해 바다여!
오직 너의 아들들만이 벌거벗은 몸으로 비밀도 없이 죽음을 기다린다.
P128~131
-> 이 시 속에서 온통 죽음이 장악한 오랑의 시내에서 벗어나 바닷물 속에서 수영을 통해 서로의 교감을 확인하고 삶의 의지를 확인하는 『페스트』속의 의사 리유와 타루의 수영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 시는 카뮈가 삶을 인식하는 방식과 시간에 대결하는 방법론으로 '반항'이라는 개념을 찾아냈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PS: 카뮈의 작품을 읽어나갈수록 양파 껍질을 까는 것처럼 언제나 새로운 속을 발견하게 된다. 이 양파의 끝이 어디만큼인지를 아직도 짐작할 수 없지만, 지금은 이 양파에 놀라고 매혹당해서 계속 껍질을 벗기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