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는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자신은 전혀 상상력이 없어서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내용을 지어내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페스트』의 서문에 인용한 '다니엘 디포'의 말과도 일관성을 갖는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의하여 대신
표현해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의해 표현해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다니엘 디포 『페스트』서문
대체로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카뮈의 소설은 상상력이 아닌 작가의 체험의 산물이며, 그가 평생에 걸쳐 주목했던 '부조리'에 관한 실험물이다. 작가수첩의 작품구상을 통해 보여지는 카뮈의 실험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뤄졌다. 그의 작품들 속에 그전 작품의 내용이 삽화처럼 삽입되어진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이 모두 커다란 실험물의 일부분임을 짐작케 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수감된 감방의 매트리스에서 오래된 잡보기사를 찾아 읽는 장면이 묘사됐었는데, 『페스트』에는 『이방인』의 주요사건인 아랍인 살해사건이 아래와 같이 삽입되어졌다.
「~그랑은 그 담배가게 여주인 있는 데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한참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그 여자가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그 당시의 어떤 체포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아랍인을 한 사람 죽인 사건이었다. 」 p85
카뮈는 사형을 목격한 이후로 평생동안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해왔다. 아래 인용글에서 우리는 '그 붉은 머리털을 한 올빼미씨'에서 『이방인』의 뫼르소를 연상하게 된다. 타루의 입을 빌어 사형제도의 폐단을 밝히는 문장들은 곧 카뮈가 평생을 걸쳐 해왔던 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정치운동을 했고, 또 같은 이유로 공산당에서 탈퇴하고 부당한 죽음을 막기 위해 호소문을 써왔고, 글을 써 왔던 것이다. 이는 카뮈의 모든 작품이 곧 카뮈 자신으로 치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사형선고였습니다. 나는 그 붉은 머리털을 한 올빼미 씨하고
결말을 지어보고 싶었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는 소위 정치 운동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결코 페스트 환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뿐이죠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 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 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렇게 믿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으며, 또 대체로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부끄러워했습니다. 아무리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 축에
끼어들었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으며,
우리들은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 제4부 p334~338
첫구상 이래로 작품의 출간까지 걸린 7년여가 걸린 『페스트』에는 카뮈가 체험한 2차 세계대전의 모습들이 그대로 재현되어지고 있다. 카뮈는 추상적인 '죽음'이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죽음'으로 실체화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들을 서술자의 입을 빌어 객관적으로 증언한다.
「~"그게 아닙니다."라고 랑베르가 말했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
제4부 p283
「~파늘루는 병 때문에 까맣게 타버린 채 모든 시대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어린애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가 슬며시 무릎을 꿇더니 나직한, 그러나 그치지 않고
들리는 그 이름 모를 신음소리들 틈에서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아무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이시여, 제발 이 어린애를
구해주소서!"」 제4부 p291
서술자를 밝히지 않는 점과 타루의 수첩에 적힌 기록을 인용하여, 개개인의 인물들에 대해 개인의 감정이 아닌 사건들만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서술자의 말대로 '페스트'로 치환된 '전쟁'의 기록물이다. 또한 이 작품은 '부조리'에 대한 통찰을 그 끝까지 밀어붙인 실험물이기도 하다. 습관화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조리'는 눈에 띠지 않는다.
「~실상 8월 중순쯤에는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버린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가장 뚜렸했던 것은 생이별과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거기에는 공포와 반항이 내포되어 있었다. 」제3부 p229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 제3부 p244
하지만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천재지변급의 재앙 앞에서 인간은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가 된 것처럼 일상과 분리된 현재의 자아를 마주치게 된다. 전쟁이 끝나면 전후문학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까닭도 바로 그 이치이다. 어느날 갑자기 맞닥뜨린 너무나 많은 부조리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인식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현실과의 왜곡 속에 놓인 일그러진 자아는 사람들의 일상에 변화를 불러온다.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끝까지 함께하고 추적하는 인물 '리유(소설 페스트 속 의사)'는 곧 카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중 '타루'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이 언도되어진 사형수의 처지이며, 모두 페스트균의 보균자들과 같지만 '전쟁'이나 '페스트' 에 직면하기 전에 '죽음'은 형이상학적인 일이자 개인적인 비극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군상을 통해 카뮈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그건 '페스트'를 종교적이나 사회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직분, 곧 의사로서 그 질병을 치유하는 일을 우선으로 했던 의사 리유의 행동과 말에서 찾을수 있겠다. 부조리를 직시하고 그것과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극복의 과정을 거울삼아 세상의 부조리를 비춰서 인간의 삶이 더 밝아지는 긍정의 과정이 바로 『페스트』를 통해 작가가 전하는 전언일 것이다.
「~손바닥 밑에 바윗돌의 울퉁불퉁한 감촉을 느끼는 리유의 마음속에 이상한 행복감이 가득 차올랐다.
타루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친구의 침착하고 심각한 얼굴에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심지어는
그 살인 행위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똑같은 행복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제4부 P343」
「~리유가 사랑했으나 잃고 만 남자들과 여자들도, 사자(死者)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잊혀졌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5부 P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