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소설습작

그녀의 불면증

묭롶 2009. 11. 27. 23:43

 

「그녀의 불면증!」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걷다가 무심코 들어선 서점에서 그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분명 역사의 한 시절을 살았음에도 자신의 정신만큼은 현실에 두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듯한 그의 초상을 보면서 난 그 책의 검은 표지만큼이나 그의 표정에 매료되었다.  ‘제임스 조이스’ 그 또한 나처럼 불면의 밤들을 맨 정신으로 매일 밤 견뎌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그렇지 않고서야 1904년 6월 16일 채 하루도 되지 않는 일상을 가지고 무려 1300여 페이지가 되는 소설을 적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난 『율리시스』에 매료되었다.  책의 역자도 작가 못잖은 사람인지 이 책 한권을 반평생에 걸쳐 3번째 번역 수정 본을 냈다고 하니 아마 그도 밤잠은 없는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그날 밤, 오로지 이 책을 비에 젖지 않게 하려고 이만원이나 주고 우산을 샀다.  (시내는 뭐든지 비싸다)  『율리시스』는 그렇게 내 침대 협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이불 속에서 차디찬 발을 꼼지락거리며 이 책을 펼치던 그 순간부터, 난 이 책 저자의 초상만큼이나 이 책이 맘에 쏙 들었다.  특히 첫 머리에

‘나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 제임스 조이스

라고 적은 저자의 글을 읽으며 항상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사는 나와 다르게 그 높은 정신의 세계 속에 자리하며 지상의 상아탑들을 겨냥하여 자신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으리라 장담하는 그에게 존경심마저 품게 되었다.  (갑자기 난 이 대목을 읽으며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책에 눈물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그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페이지마다 거의 절반 분량을 차지한 엄청난 양의 주석들이었다.  (내 짐작컨대 역자에 의해 계속해서 그 분량이 늘어났으리라)  아마도 그 주석들을 지도 삼아 이 책을 온전히 다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그러다가 잠이 와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조금은 품어본다)

  저녁 야근시간에 다른 직원들이 담배를 태우기 위해 잠시 자릴 비운 틈을 타서 난 『율리시스』를 사내망(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겠지만-소문에 슈퍼호스트컴퓨터로 개인PC의 로그기록을 뒤진다는 얘기가 파다했으므로)으로 검색어 ‘율리시스’를 떨리는 마음으로 자판에 ‘ㅇ ㅠ ㄹ ㄹ ㅣ ㅅ ㅣ ㅅ ㅡ’자음 모음을 신중히 입력했었다.  (나처럼 이 책에 매혹당한 누군가를 찾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난해하다’, ‘읽다가 포기했다’, ‘읽으려고 한다’, ‘과연 읽을 수 있을까?’ 등등...... 내가 원하는 반응의 글은 블로그, 지식검색, 카페 등등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젠가 내가 이 책의 수수께끼를 풀게 되면 책의 배경 도시인 ‘더블린’에서 제임스 조이스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블룸즈데이(소설속 주인공 블룸의 이름을 딴)’를 기념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특이하게도 ‘율리시스’라는 아이디를 가진 수의사의 블로그를 알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 수도 있겠다. 


 거실 유리창 바깥은 그 너머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농도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암흑과의 경계를 구분 짓기라도 하듯 유리창을 경계로 거실은 금방이라도 레이저 같은 빛줄기가 쏘아져 나올 것처럼 밝은 등으로 밝혀져 있다.  거실장 어딘가에 오디오 장치가 있는지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오고 벽면에 놓여있는 4인용 소파 위에 이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옆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예기치 않은 강펀치를 한 대 맞고 갑자기 기절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누워있는 그녀의 팔 한쪽은 몸통 아래에 깔려 있고, 다른 팔은 부피가 두꺼운 책의 접혀진 책장 가운데에 손가락이 끼어 있다.  잠든 얼굴 바로 위에서 내리 꽂히는 불빛에도 미간을 찡그리거나 뒤척이지도 않고 잠들어 있던 그녀가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소파에 앉는다.  일어남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팔에 안긴 채, 양장본 표지가 닫힌 책으로 향한다.  검은색 책 표지 겉면에 역시 연한 검정색으로 찍혀 있는 ‘율리시스’란 제목이 보인다.  표정 없는 그녀의 눈이 그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연필을 찾아내고는 이내 지우개가 달린 끝부분을 입에 물고 책장을 펼친다. 

p114 ~나는 얼어붙은 리피강 위 그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지글지글 끓는 송진의 불 사이, 귀신이 대신 놓고 간 저능아(低能兒)인, 나.  나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나에게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펼쳐진 책은 이 구절의 바로 아랫부분까지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어 ‘그래, 나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어’라고 한숨을 내쉬듯이 목소리를 뱉는다.  입을 열면서 떨어진 연필은 바닥에 떨어지며 흑심이 부러진다.  그녀가 조용히 책을 덮어 소파에 올려놓고 거실장의 맨 위 서랍을 열자 그 안에 깎지 않은 지우개연필 수 십여 자루와 커터칼이 보인다.  옆에 놓인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자 바닥에 수북하게 깔린 연필심 가루들과 나뭇조각들이 절반정도 차 있다.  칼날을 끝까지 길게 쭉 빼서 한참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녀가 진저리를 한 번 치고는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거실 유리창에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이 비칠 뿐, 바깥은 아무 소리도 아무 불빛도 어떠한 기척도 없이 무섭게 어둡기만 하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도중에 잠이 들었던 것인지 차가 멈추는 기척을 느끼고서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허둥지둥 지갑에서 택시비를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미처 거슬러 받지도 못했는데 건너야할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곧 보행신호가 꺼지기 직전이다.  급히 내려서 핸드백과 쇼핑백을 미처 추스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팔에 끼우고 손가락에 건채로 횡단보도를 중간쯤 뛰어서 건너는데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말았다.  얼굴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안면몰수하고 달려드는 차들을 향해 자유로운 오른손을 내저으며 건너는데, 보도블럭 바로 앞에서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한 봉고차에 치일 뻔 했다.  그렇잖아도 빨개진 얼굴을 향해 날카롭게 브레이크 밀리는 소리가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아저씨의 욕설과 섞여서 동시에 날아왔다.  욕을 먹어서 빨라진 발을 부지런히 앞세워 커머셜 금융 후문으로 들어갔다.  후문을 지나 자리에 이미 앉아서 업무 준비를 하는 남직원들을 지나쳐 다용도실로 들어가자 수납창구를 맡고 있는 계약직 수경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이라인의 꼬리부분을 그리고 있었다.  재빠르게 옷장문을 열고 코트를 벗고 화장을 하기 위해 옷장문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언니!  이제 아주 제복으로 출퇴근을 하네.”  수경이 업무준비가 완료된 얼굴로 벗은 코트 속에 입고 온 내 제복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요새도 못 자?”  대답 없이 거울만 보는 내게 수경이 다시 물었다.  “그렇지 뭐.....,” ‘저 언니는 아침마다 왜 저래’하는 표정으로 수경은 고개를 젓고는 커피포트로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커피에 물을 부은 후 창구로 나갔다.  화장도 고객만족을 위한 배려라는 사내교육지침대로 얼굴에 그림을 그리던 손길이 립스틱을 바르다 말고 주춤했다.  눈 아래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다크써클을 감추기 위해 연신 덧발라진 파운데이션이 들뜬 핏기 없는 얼굴, 문득 거울을 보고 있는 내가 정말 나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실재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문득 진짜 나는 방금 전 건너려던 횡단보도를 미처 건너지 못하고 중앙선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마지막 보도블럭 한 발자국을 앞두고 차에 치어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열 세 살 때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쳤다.  죽음은 내게 예기치 않는 순간에 멈춰버린 시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와 같은 시간대를 살던 사람들이 동 시간대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계속해서 시간 속을 나아가지만 그들은 어느 순간에 멈춰버린 바로 그 상태가 내가 경험한 죽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그 즈음 나는 날마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동네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줄넘기, 공기놀이, 사방치기 등을 하기에 바빠서 저녁어스름이 내려 전봇대에 노란 등이 들어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집으로 들어갔었다.  생전가야 공부하라는 말씀 한 번 없던 부모님이라서 딸이면서도 다른 집 아들들보다 더 망아지처럼 뛰어다녀도 꾸지람 한 마디가 없었다.  놀다가 돌아오는 길 집 앞 어두운 골목길을 지날 때면 언제나처럼 무섬증이 들어서 “어~~엄~~마!  엄~~~마!”를 부르며 고개를 숙인 채 마구 뛰어가다가 어느새 열린 대문 사이로 뿜어져 나온 노 오란 빛 무리 속으로 들어가고서야 멈췄던 숨을 몰아쉬곤 했다.  넓은 마당 위쪽으로는 마루가 있었고 그 중앙으로는 할머니가 지내는 안방, 그리고 안방 옆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어서 매 30분이면 ‘뗑!’하고 한 번 울리고 매 시 정각이면 시간만큼 종소리를 울렸다.  동그란 시계판 안에는 좌우로 시계태엽을 감는 구멍이 있어서, 난 집에 들어오면 맨 먼저 시계로 달려가 유리덮개를 열고 검은 구멍에 열쇠를 꽂아서 시계 밥을 주곤 했다.  오른쪽으로 열쇠를 돌릴 때마다 까드드득 까드드득 태엽이 감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손가락으로도 내 몸으로도 팽팽해지는 태엽의 떨림이 전해졌다.  열쇠를 왔다갔다 똑딱이는 시계추 아래에 얌전히 내려놓고 오른쪽으로 젖혀진 시계덮개를 닫고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힘차게 움직이는 째깍째깍 소리에 내 마음 속에 있는 시계도 힘 있게 박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개학이 보름 정도 남아 있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시계 밥을 주려다가 시계 유리 덮개 위에 붙어 있는 빨간 표 딱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멈칫하며 서 있는 내게 아빠는 시계 말고도 빨란 표 딱지가 붙어있는 다른 물건들도 손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시계가 왠지 멈춰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친구들과 놀이를 하고 있어도 계속 시계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작 멈춰버린 것은 엄마와 아빠였다.  그날 저녁은 이상하게도 평소 어두웠던 골목이 초입부터 훤히 밝혀져 있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집으로 향하는데, 대문 앞에 한문이 쓰인 노란 등이 켜져 있었고, 마루에는 평소 잘 보지 못했던 친척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앉아 웅성거리고 있었다.  친척들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앉아 있었는데, 항상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할머니는 그날따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의 담뱃재를 온통 방바닥에 다 흘리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시계에 다가가던 나에게 갑자기 할머니가 “애비, 애미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이라고 이를 갈 듯이 내뱄었다.  황망한 표정의 작은엄마가 나를 건넌방으로 데려가 주었고, 어두운 방에서 난 그 말을 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내 가슴 속에서 뛰던 시계가 멈춰버렸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난 신경정신과만 빼놓고 다른 모든 노력들을 다 시도해보았다.  양파를 썰어서 침대 맡에 놓고, 피워놓으면 잠이 잘 온다는 향초도 태워보고, 보고 있으면 숙면을 취하게 된다는 그림도 걸어놨으며, 아로마 오일 목욕에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는 각종 차도 마셔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의원에서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며 맘을 편하게 먹으라면서 잠도 몸이 건강해야 잘 온다며 보약을 처방해 주었다.  옆자리의 신대리가 요즘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베개에 머리만 대면 아침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스트레스만이 원인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 푹 자는 신대리가 너무 부러웠다.  자면서 소변이 마려우면 자주 깰 수 있다는 말에 저녁을 먹고 난 이후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건만, 난 자다가 화장실을 대 여섯 번도 넘게 들락거렸다.  푹 자려는 노력 중 그나마 성공적이었던 것은 술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것이었지만, 항상 인사불성이 되기도 전에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져서 꼭 후회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 방법은 포기하게 되었다.  감기라도 걸리게 되면 한 달이 넘도록 낫지 않아서 순환기 내과를 한 달 내내 들락거려야만 했다.  그렇게 자주 다니는 순환기 내과의 여자원장은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도록 안정제나 수면제를 처방받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잠이 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생으로 머리가 아파질 즈음이면 수면제라도 몽땅 사서 한꺼번에 털어놓고 몇날 며칠을 죽은 듯이 자고 싶은 맘이 간절해졌다.  밤새도록 잠이 오기를 기다리다 다섯 시 정도에나 잠이 들어버리면 혼수상태가 돼서 알람을 세 개를 맞춰놓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나마 밥 수저로 한 수저 가득 풀어서 타놓은 블랙커피가 있어 직장 내에서 남직원들은 내가 불면증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오전 업무가 끝나고 회사가 업무피크타임이라고 말하는 골든타임이 돌아왔다.  한 마디로 대출을 하고 이자를 제때 납부하지 못했거나, 분할 상환하는 원리금을 납부하지 못한 고객들에게 전화를 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이란 뜻에서 지어진 골든타임이었지만, 사실 우리에겐 ‘골병든 타임’이었다. 오전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하지만 그 시간에 연체독촉 전화를 하면 ‘오전부터 전화하고 xx’, 오전 10시에 하면 ‘한참 오전 업무 내지는 장사 초입부터 전화한다고 xx', 오전 11시에는 ’점심 장사 시작해야 해서 한창 바쁜데 내지는 밥맛 떨어지게 xx',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나마 사람이 배부르면 조금은 남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생긴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붙인 명칭이 골든타임이었다.  골든타임인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온전히 전화통만 붙잡고 통화를 해대면 200통 이상은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200통의 통화는 내가 거는 전화만 200통이라는 의미일 뿐 사내 방침대로 수화기 벨이 두 번 이상 울리기 전에 오는 전화도 받아야 했다.  나는 평소처럼 스타벅스에서 구입한 초대형 텀블러에 블랙커피를 가득 타놓고 계속해서 한 모금 씩 마시며 추심업무를 시작했다.  통화를 하며 연신 고객과의 통화내용을 전산 모니터를 보며 입력하느라 몸의 무게중심은 온통 어깨에 걸쳐져 왼쪽 귀에 고정된 수화기 쪽으로 쏠려있었다.  사실 우리의 일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회사에서 준 방침을 고객에게 고지하고, 고객이 하는 욕설 내지는 불만을 들어주는 일이다.  그러다 원래 목적대로 고객이 연체금을 입금해주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허술하게 월급을 주는 회사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업무능력은 담당별 총 채권금액 대비 연체율(RISK)로 RISK의 내림차순으로 서열이 줄 세워졌다.  골든타임에 골병들어 이직률이 높은 것이 이 직종의 특징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벌써 10년 넘게 이 업무를 맡고 있는 나를 회사는 진급도 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여직원들처럼 계약직으로 돌리거나 정리해고 하지도 않았다.  옆 자리에서 수납창구를 맡는 계약직 수경은 내가 아침마다 뽑는 통화예정 목록을 옆에서 흘깃 쳐다 볼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녀는 “언니, 고객들이 막 쌍욕하고 그러면 성질 안 나?  나 같으면 뚜껑이 열려도 하루 열두 번도 더 열렸을 것 같은데.”라며 큰 눈동자를 똥그랗게 뜨고 묻기도 했다.  “음... 너 그말 들어봤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 이란 말”  그래도 수경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상가집에 가면 제일 못 사는 딸이 가장 서럽게 운다는 말은”  수경의 얼굴이 금방 새치름해졌다.  “그건 가슴에 맺힌 게 많아서 터질 것 같은 사람은 기회만 생기면 그걸 다 쏟아내려 한다는 뜻이야.” 덧붙여서 말해보지만, 그래도 아직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짓는 수경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모습에 부러움과 시새움이 솟아나 마침 대기 순번표를 들고 울리지 않는 창구 번호 표시등을 노려보던 손님이 보이자 나는 수경에게 빨리 응대하라며 눈치를 줘서 수납창구로 밀어냈다.

  

   ‘띵동!’  고개를 숙이고 긴 머리가 온통 펼쳐진 책장에 흘러내린 채로 ‘율리시스’를 신중하게 밑줄을 그으며 읽던 그녀는 초인종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띵동!’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리자 그녀는 냉큼 소파위로 올라가 책과 함께 접은 무릎을 팔로 감싸 안는다.  흡사 바닷가 갯벌에서 흙을 집어먹다가 사람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 구멍 속으로 쏙 하고 숨어버리는 집게발 게를 보는 것 같다.  ‘띵동, 띵동!’ 조금 더 신경질적으로 연속해서 누르는 것처럼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쇼팽의 녹턴op2의 선율을 무음으로 볼륨을 죽인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고 현관문의 맞은편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간다.  온통 바닥과 천장 그리고 세면기와 변기까지 하얀색으로 이뤄진 욕실의 전면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다.  거울의 위에 달린 주광이 높은 전등이 하얀 욕실에 하얀 빛 무리를 뿜어내서 욕실은 빛 무리의 입자들로 가득 찬 안개 속처럼 몽롱하다.  거울 앞에 맨 발로 선 그녀가 거울 속의 그녀를 본다.  빛 무리의 안개에 마취된 듯 멍한 표정의 그녀가 오른 손을 들어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연필로 거울 속의 그녀 위로 밑줄을 긋는다.  마치 그녀를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떼르르릉!, 챠르르르르르!, 뗑뗑뗑!’....., ‘쿠당탕 퍽?’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새우처럼 오그린 채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갑자기 일으키자 뼈에서 뚜둑, 뚜둑하면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보다 급히 나는 낯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거실로 나왔다.  거실 바닥에 부서진 알람시계의 잔해가 온통 흩어져있었다.  남편은 다시 자러 들어갔는지 남편이 자는 거실방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그 와중에도 울리고 있는 침실의 알람시계를 끄기 위해 걷는데 무릎이 자꾸만 꺾였다.  알람을 끄고 다시 거실로 나왔는데, 거실장 위에 메모가 붙여진 노란봉투가 눈에 띄었다.  ‘꼭 도장 찍어!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악필인 내가 항상 부러워하던 정자체의 글씨, 남편의 필체였다.  그새 봉투만 놓고 출근을 한 것인지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신혼여행 동안 밤이면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던 나를 향해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봐”  라고 말했던 남편은 신혼집에 와서도 변함없이 못 자는 나에게 “다 마음먹기 나름이야, 맘을 편하게 가져, 여기 우유 데워 왔어, 불면증은 병이 아니야! 차차 나아 질 거야.” 라면서 날 위로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일 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새벽녘에 내가 몸을 뒤척이자 그와 동시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남편은 “씨발, 당신은 미쳤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서재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그 후로 일 년 정도를 남편은 계속해서 이혼해달라는 말 외에는 내게 어떠한 말도 걸지 않았다.  그를 내게 소개해준 지점장은 이 남자는 매사에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며 이 남자랑 살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 땐 왠지 나도 이 남자처럼 정확한 사람이라면 내 맘 속에서 멈춰버린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하지만 부서져버린 알람시계의 파편을 치우며 나는 그의 말처럼 정말 내가 미친 건 아닐까 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는데, 남들 눈에 미친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미친 것일까?  나만 괜찮다면 난 정상인 것일까?  미친 사람들은 죄다 자신이 정상이라고 주장을 한다는데 나도 그런 것일까?’  사실 의사가 권했던 신경정신과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날 보고 정신과 의사가 정신이상이라는 진단을 내린다면 난 어찌해야 하나 라는 불안감 때문에 난 정신과를 갈 수가 없었다.  또 그 불안감의 한 편에는 매사에 철두철미한 남편이 정신과치료이력을 이혼을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크게 작용했다. 

  한곳에 모아서 조그만 봉분처럼 보이는 시계의 잔해들을 방치하고 잠시 동안 텅 빈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거실 벽걸이 시계의 시간이 오전 8:0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9시부터 고객관련 업무는 시작하지만 8시엔 도착해서 고객 응대를 위한 화장을 마치고 8시 30분부터는 하루 동안의 업무계획 내지는 통화예정목록 작업을 해놓아야 하는데 지각이었다.  조용히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받는 수경에게 지점장을 바꿔달라고 했다.  통화대기음의 ‘저희 커머셜 금융은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부근에서 성미 급한 지점장이 전화를 받았다.  몸이 아파 하루 결근하겠다는 나의 말에 지점장은 딱 한 마디만 했다.  “이달 리스크 목표는 차질 없겠지?”  조용히 대답하는 내 목소리를 자르는 통화 종료음 ‘뚜우...뚜우...뚜우’를 한참동안 듣다가 수화기를 내려놓다 말고 갑작스럽게 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그 역시 응답이 짧았다.  “응,,,,,점심때 시간 좀 내줘.....,”  한참동안 대답이 없던 그는 사무실 근처 백반 집 상호를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마냥 하릴없이 쳐다봤다.  나는 씻기 위해 벗은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즈음에야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감은 채로 화장대에 앉아서 거울을 다시 봤다.  눈의 흰자위에 온통 핏빛 거미줄처럼 핏줄기가 퍼져있어서 그곳에 눈동자에 비친 거울 속 내 모습이 걸려 있었다.


  『율리시스』는 들고 다니기에는 좀 버거운 책이다.  부피와 무게가 상당해서 검정색 표지의 그 책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 동안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여러 명 마주쳤다.  남편이 알려준 백반 집은 타고 온 택시를 큰길가에서 내리고도 골목길을 약 오 분정도 걸어들어 간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남편이 미리 예약을 해 두었는지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나에게 다가온 종업원이 예약이 되어 있다며 분리되어 있는 방들 중 한 곳으로 안내했다.  온돌바닥에 하얀 문풍지를 바른 문, 하얀 전지가 깔린 상을 중심으로 한쪽 벽면엔 사군자가 그려진 병풍이 둘러져 있고, 다른 쪽엔 난화분과 도자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난 코트를 벗어 내 옆에 두고 하얀 전지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남편은 정확하게 약속시간에 맞춰서 미닫이문을 열었다.  양복 상의를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던 그가 상 위에 놓인 책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손이 순간 그의 시선이 꽂혔던 책을 상 아래로 숨겼다.  “서류는 가져왔지?”,  “아니.....,”  고개를 숙인 내 머리통에 꽂힌 그의 쏘아보는 안광이 날 뚫을 것만 같다.  내 눈은 온돌바닥에 고정된 채 손은 연신 책을 더듬고 있었다.  “그럼 왜 보자고 한 거야?”,  “내가 노력할게, 정신과도 가 볼게....,”, 고개를 드니 날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던 그가 피식 웃고는 “알아?  당신은 불면증만 문제가 아니라 당신, 자체가 문제야”  낮게 쏘아붙이고는 걸어 놓은 양복 상의를 다시 걸치고는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나서도 난 계속 방바닥만 쳐다봤다.  온통 핏발 선 채 충혈 된 내 눈이 날 미쳤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줄까 두려워 눈도 마주치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식사도 하지 않고 책을 들고 문을 나서는 나를 입구에서 안내했던 종업원의 호기심 가득 찬 눈길이 골목길을 걸어가는 내 등 뒤에 길게 꽂혔다.  한참을 정처 없이 걷다가 길 가에 비치된 벤치를 발견하고서야 난 온통 욱신거리는 손과 발을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앉은 채로 나는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량들을 쳐다봤다.  내 망막이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물들을 비추고 있는 동안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듯 공터에 흙먼지를 허공으로 말아 올릴 때 들리는 바람소리만이 ‘휘이잉.....,휘이잉’하는 이명으로 들려왔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몸속에서 불어대는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온갖 가지 표정으로 내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멍한 나는 허수아비처럼 속이 다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내 알맹이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들리는 바람소리 속에서 하나의 물음이 수 만개의 메아리의 파편이 되어 내 몸을 두들겼다.  멍한 내 귀에 내 쪽으로 가까워져오는 소음이 들려왔다.  소음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내 눈에 교복을 입을 세 명의 중학생들이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 섞인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문득 지금쯤이면 사무실에서 고객들한테 한참 욕을 먹고 있을 업무피크타임인 골든타임 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는 그들의 욕설을 그냥 듣고 있던 내 시선이 그들 중 한 학생과 마주쳤다.  “뭘 봐, 이 씨댕아.”  그 나이 무렵의 특징인 치기와 감정과잉이 느껴지는 욕설이었다.  욕을 먹고도 멍하게 그들을 향한 시선을 거둘 줄 모르는 나에게 그 학생은 손가락으로 돌았다는 손짓을 하며 일행들과 깔깔대며 내 곁을 지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뱉은 내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개새끼”  그 순간 난 알게 되었다.  내가 너무나 오래전부터 욕을 하고 싶어 했다는 걸.....,


  할머니는 원래 욕을 잘했다.  좋은 일이 있어도 욕을 했고, 굳은 일이 생겨도 욕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는 주로 나에게 욕을 해댔는데, 날 향한 욕 중 대부분은 ‘부모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이었다.  어린 맘에 난 그 말이 참 이상했다.  내가 ‘부모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이면 할머니는 ‘자식 잡아먹은 재수 없는 년’이 되는데, 부모를 잡아먹은 경우가 더 재수가 없는지, 자식의 경우가 더 재수가 없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야했다.  작은아버지들은 욕 잘하는 어머니를 누가 모실지를 놓고 여러 번 설전을 벌였지만, 차라리 이혼을 하지 시어머니는 못 모시겠다는 작은 엄마들의 주장에 못 이겨 작은아버지들은 날 고아원에 보내는 대신 약간의 생활비를 주는 조건으로 날 할머니와 함께 살게 했다.  그때부터 노인은 갑절은 늘어난 욕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가 보인다.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일까?  내려오고 있음을 표시하는 숫자판의 빨간불이 너무나도 천천히 바뀌고 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양 손을 그러모아 깍지를 낀 채로 입에 가져다대고 연신 물어뜯는다.  ‘띵동!’  드디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환한 불빛이 어두운 실내를 가르면 난 허겁지겁 그 안으로 들어간다. 

빨리 닫히지 않는 문이 가슴이 터지도록 무섭다.  금방이라도 손이 쑤욱 하고 들어와 닫히던 문을 열어버릴 것만 같은 초조함에 닫힘 버튼을 연속해서 손가락으로 누른다.  문이 닫히고 숫자판을 누르려 하지만 이번에는 숫자판에 글씨가 없어서 내가 가려는 층을 누를 수가 없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모든 층을 다 눌러놓자 숫자판엔 온통 불이라도 난 것처럼 빨간불이 들어왔다.  ‘띵동!’  알림벨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문이 열리자 나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조심스럽게 내가 가려는 층이 맞는지를 확인한다.  몇 번이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닫힌 후에야 내 집인 듯 보이는 아파트 문 앞에 서 있는 내가 보인다.  나는 안에 있는 누군가가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초인종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한 번을 눌러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두 번째로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누르고는 귀를 현관문에 가만히 대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닫힌 문 틈새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피아노 선율이 뚝 끊긴 실내에서 너무도 고요한 정적이 차가운 문의 선뜩함과 함께 전해진다.  갑자기 다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초인종을 연거푸 계속해서 누른다. ‘띵동! 띵동! 띵동.....,’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일까?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벤치 건너편이 온통 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꼭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붉은 기운이 물든 길 너머의 풍경은 단독주택을 맛있게 날름날름 살라먹던 불길과 닮아 있었다.  치매에 걸려서도 입에 문 담배에 불을 켜기 위해 담배를 문채로 욕을 중얼거리며 라이터를 찾던 할머니.....,  할머니는 매번 욕설 끝에 나 때문에 빨리 못 죽는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 주문 덕분이었는지 노인은 두 번의 대장암 수술을 받고도 무려 8년을 살아냈다.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의 식탐은 집요했다.  시시때때로 군것질을 탐하던 노인이 혈변을 쏟기 시작한 것은 내가 커머셜 금융에 합격하고 첫 출근을 위해 기다리던 여상 3학년의 여름방학 때였다.  수술을 앞두고 의사는 내게 노인이 고령이라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과 함께 수술동의서를 내밀었지만, 난 노인이 끄떡없이 말짱하게 깨어날 거라고 확신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노인은 수술 후 회복실에서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깨어났고, 눈을 떠서 내가 보이자마자 애써 키워봤자 재수 없는 년하고 살아서 복조가리가 없다며 욕을 했다.  일반병실에 올라와서도 회복에 좋다는 개소주와 알부민을 때맞춰 사오지 않는다며 갖은 욕을 해대는 노인을 보고 옆 병상의 할머니 연배의 환자는 내게 저 노인이 갈 때가 가까워서 정 떼려고 저런다고 말했지만 난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대장암은 첫 번째 수술을 한지 삼년이 지나서 재발했다.  첫 수술 때 삼분의 이를 자라냈던 대장을 두 번째는 소장까지 드러내서 배에 구멍을 뚫어 바로 위장으로 연결하는 수술을 받은 후에도 노인은 말짱하게 깨어났다.  그때가 이미 노인의 나이 여든 여덟이었다.  먹기만 하면 바로 뚫린 배에 연결된 배설봉투로 쏟아지는데도 먹는 걸 멈추지 않던 노인을 보며 난 정말 나 때문에 저 노인에게 죽음이 안 찾아오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저 노인보다 먼저 죽게 되면 그 다음엔 저 노인 차례가 될 것인지가 궁금해진 것은 치매에 걸린 노인 간병을 위해 받은 마이너스 대출이 삼천만원을 넘어가던 즈음이었다.  신기하게도 노인은 간병인에게는 욕을 하지 않았다.  바스러질 듯이 마른 몸으로 온전하지 않는 정신으로도 나만 눈에 띄면 노인은 중얼중얼 욕을 해댔다.  흔들리는 손으로 담뱃불을 붙이다가 이불로 불이 옮겨 붙어 큰불로 번질 뻔 했던 후로는 노인 주변에서 화기는 모두 치워놓아서 노인의 입가에는 그냥 담배만이 물려있었다.  노인은 그 담배를 온통 침으로 흠뻑 적셔서 입가가 온통 담뱃재로 지저분했다. 

  집에 불이 난 그날은 간병인 아주머니가 상을 당해서 집에 오지 못하겠다고 갑작스럽게 전화를 했던 날이었다.  그날 한창 사무실에서 돈을 못 주겠다는 고객을 상대로 연체금 입금을 부탁하는 전화를 하고 있던 내게 옆 자리의 남직원이 굳은 표정으로 급한 전화라고 먼저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도 난 그냥 덤덤했다.  화재사건 조사를 위해 만난 소방서 조사관은 문이 잠긴 방 안에 노인이 혼자 있었던 경위와 노인이 라이터를 손에 넣게 된 연유를 내게 물었지만 간병인이 없는 상태에서 출근해야 했던 상황과 노인이 치매에 걸린 중증환자였다는 점이 참작되어 조사는 형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어둠이 내린 벤치 옆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걸 보고서야 어둠이 내린 길거리를 새삼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무릎에서 ‘또독’하는 소리가 났다.  옆에 놓인 『율리시스』를 집어 들면서 난 문득 동물병원을 운영한다는 아이디 ‘율리시스’를 떠올렸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동물병원의 위치를 물어본 후 택시를 탔다.  동물병원은 차로 이 십여 분 떨어진 주택가 입구에 있었다.  『율리시스』책을 손에 든 채, 병원에 들어선 나는 아이디 율리시스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집 강아지가 다쳐서 그러는데, 졸라제팜(동물용 수면제)와 황산마그네슘, 그리고 주사기 두 개만 구입할 수 있을까요?”  느닷없이 나타나 동물용 수면제를 달라는 나를 보며 그는 “어딜 다쳤는데요?  데려와서 제가 치료를 하는 게 나을 텐데요.” 라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네, 엊그제 집 앞 동물병원에서 치료는 받았는데, 그 집이 오늘 문을 닫아서요.

밤에 아파서 짖기라도 하면 민원이 들어올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무표정한 내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기색을 찾으려는 듯 나와 내가 손에 든 책을 번갈아가며 여러 번 쳐다보았다. “그럼 용량은 정확히 지키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 적어드릴게요.”  “개가 골든 리트리버라고 하셨죠?”  ‘음, 무게가 있으니 좀 많이 써야겠군’  머리를 긁적이며 그는 하얀 봉투에 일회 투약수치를 표기해 주었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하얀 봉투를 조심스럽게 받아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연필로 밑줄이 그어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거울 속 그녀에게 쳐진 거뭇한 연필선이 살짝 벌어지는 듯하다.  벌어진 그 틈에서 선홍색의 기운이 비친다.  벌어진 연필선의 틈새로 아주 새빨간 피가 살짝 배어나와 그 선위에 맺힌다.  그 빨간 방울에 홀린 것처럼 거울 밖의 그녀가 거울 속 그녀의 핏방울에 손가락을 가져댄다.  ‘쓰윽’ 거울에 닿은 손가락이 거울에 그어진 연필 자국을 지운다.  순간 거울 속에서 핏방울이 ‘쓰윽’ 번진다.  그녀가 지워진 선을 메우려는 듯, 반대편 손에 들린 연필로 다시 거울에 선을 긋는다.  잠시 사라졌던 선의 틈새가 더욱 커지면서 그 틈새에서 붉은 핏줄기가 솟아나 거울 속 그녀를 빨갛게 적신다.  그 모습을 보는 거울 밖의 그녀는 이제 편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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