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소설습작

거실(정적)

묭롶 2009. 2. 23. 14:20

  밝은 실내등이 비추는 거실은 차가운 봄비가 내리는 유리창 밖과는 분리된 공간이다.  이중창으로 인해 차단된 실내의 소리 또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깥과는 다른 세상이다.  그렇게 분리된 세상이 층층이 불을 밝힌 채 거실창문 밖으로 보인다.  쇼팽의 에뛰드 중 겨울바람이 실내를 휘감는 공간의 가운데 커다란 쿠션에 등을 기댄 채 김밥에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여자의 뒷머리가 보인다.  오른손으로는 김밥을 집어 대충 씹어삼키면서 왼손으로는 머리를 감아서 덜마른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곱슬머리를 찾아 더듬으며 눈으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양장본을 읽고 있다.  눈, 귀, 입, 손이 저마다의 역할로 분주한 가운데 이불로 덮여 있는 다리는 무릎을 구부린채 얌전히 책을 받치고 있다.  다리는 캔맥주가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을 올바로 세워 냉장고로 향할 수 있었다.  거실에서 바깥 베란다로 통하는 미닫이문 너머로 냉장고가 보이자 팔은 미닫이의 모서리를 손가락을 집어넣어 밀다가 미끌려서 손톱을 문에 짓찧고만다.  그와 동시에 "에이 씨!" 하며 먹기만 했던 입은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제서야 문득 핸드폰 벨소리를 무음으로 해놓았다는 것을 깨닫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 유일한 소리는 홈 씨어터에서 흘러나오는 FM클래식 채널의 피아노연주곡과 냉장고에서 냉매가 흐르는 소리, 화장실 변기에서 간간이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와 다른 독립된 공간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들 뿐이다. 

 

  냉장고 속에는 조그맣게 맥주 안주가 사은품으로 달려있는 6개들이 캔맥주들이 선명한 오픈마크를 드러내고 있다.  가끔 맥주가 떨어질 때면 급히 사온 수혈품들을 냉동실에 넣어놓고 빨리 저 선명한 오픈마크가 나타나기를 안달복달 기다리다가 미닫이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와선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게 잊혀진 것들을, 다시 급한 맘에 냉동실에 채우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멋쩍게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선명한 오픈마크는 기다림에 지친건지 손잡이를 따지도 않았는데, 통째로 자신의 몸뚱이를 오픈하려고 몸부림을 친 것처럼 위 아래 옆구리 가릴 것 없이 불룩해져서는 금이 쩍하게 가버린 채, 찢어진 몸뚱이를 눈 앞에 들이밀며 온 몸으로 항의를 한다.  그럴때면 무안한 맘에 냉동실에 넣지 못한 맥주를 냉장실에 넣어놓고선 냉큼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와버린다. 

  오늘은 다행이도 맥주가 떨어지지 않아서 발랄하게 선명한 오픈마크를 선보이는 맨 위에 서 있던 놈과 그 놈을 싸고 있던 종이에 붙어 있는 사은품 안주를 뜯어 들고선 거실에 파 놓은 이불 구덩이로 돌아온다.  어깨에 메는 가방 속에 들어있는 핸드폰에는 빨간 불이 전화가 오고 있음을 규칙적으로 알리고 있지만, 알 턱이 없다.  한동안 예의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책을 읽다가 현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갑작스럽게 내려놓아 읽던 페이지에 끼어지지 못한 채 굴러가는 노란색 연필......이 시간에 누구일까?  이곳으로 올 사람이 없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심장의 핏줄이 튀어 나온 채 식어가며 파아랗게 굳어가는 것만 같다.  안절부절하는 손을 이불 속에 집어 넣고 홈 씨어터의 볼륨을 줄여놓고 공격을 받은 거북이처럼 숨을 죽이고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문밖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이번엔 더욱 숨소리를 죽이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다.  잠시후 계단을 딛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잘못 울렸던것인가... 술에 취한 누군가 집을 잘못 찾아서 초인종을 잘못 누르고는 뒤늦게 호수를 보고선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서 머리를 긁적이며 어두운 비상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침입해 들어온 낯선 소리로 인해 엉망이 되버린 공간의 적막에 갑자기 신경질이 나서 거실창 밖으로 보이는 불켜진 다른 공간을 노려본다.  이미 안정을 잃어버린 거실에서 빈 캔통과 안주부스러기를 들고서 리모컨 볼륨을 올리자 라디오에서 밤 12시를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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