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묭롶 2009. 2. 8. 23:43

 

 서머싯 몸의 자전소설인 『인간의 굴레에서』는 1898년 그가 20대 초반일 때 『스티븐 케어리의 예술가적 기질』이라는 제목으로 씌여졌으나 당시에는 출판에 실패한 후 1915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이 작품이 출판되고서 '모르는 것을 쓰기보다 아는 것을 쓰는 게 더 쉽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1898년에 출판이 실패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인간의 굴레에서』는 초기 작품에서 담아내지 못했던 무르익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서 그의 차기 작품인 『달과 6펜스』의 원형(클러튼에 대한 묘사)을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를 곁눈질해 보았다.  키가 크고 가시처럼 말랐다. 

얼마나 말랐는지 굵다란 뼈다귀들이 몸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팔꿈치는 또 얼마나 뾰족한지

허름한 옷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올 것만 같다.  ~짐짓 엄숙한 태도로 말하긴 했지만, 흉측하게 생긴

거대한 코 때문에 그 말은 아주 기이하게 들렸다.  」P300

 

「~그는 자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술학도들과는 달리 남의 조언을

구하지도 않고 남에게 조언을 하지도 않았다.」P338

 

「~클러튼은 취향이 매우 까다로웠다.  자기도 확실히 붙잡지 못하는 어떤 것을 목표로 삼고,

언제나 자신의 그림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그는 조롱하기를 좋아해서 조롱할 대상이 누군가 있으면 아주 즐거워했다. 

그림말고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이 좀처럼 없었는데 그것도 더불어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두 사람하고만 이야기했다.」P339~340

 

「~클러튼은 표현력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면 애를 먹었다.」P383

 

  이상의 인용된 글에서 표현된 클러튼의 모습(클러튼이 브르타뉴에서 만났다는 증권 브로커도 고갱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와 많이 닮아있다.   

또한 필립이 밀드레드를 사랑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인생의 베일』에서 페인박사가 불륜을 저지른 키티에게 느끼는 감정과 닮은꼴이다.  필립과 페인박사의 사랑은 상대방에게 상처받는 자신을 관조하며 냉정하게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굴레>를 통해 그의 후기작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작가에 대한 문학사적 관점이 작가의 전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이유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여러 작품에 퍼즐 블럭처럼 흩어져 있는 작가의 상상력과 작품세계의 근간을 찾아서 한 작품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 작가의 통시적 세계를 그려본다는 점에서 <인간의 굴레>는 서머싯 몸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필립 케어리는 어린 나이에 의사였던 아버지를 병으로 잃고, 뒤 이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블랙스터블 사제였던 숙부에게 맡겨진다.  선천적으로 다리기형이 있었던 그는 학교생활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장애로 인해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 채 자신에게로 천착하게 된다.  그는 독서를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하지만 생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 그러한 것이 이론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환경은 그가 선택할 여지도 없이 그에게 굴종과 죄의식을 느끼게 했는데

그는 숙부가 원하는 사제의 길을 버림으로써, 종교적인 구속에서 벗어난다.  학교에서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반발하여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1년여를 유학하던 중, 헤이워드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인 기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표현하기 위해 숙부의 반대를 무릎쓰고 파리로 유학을 가지만 자신의 재능이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판단하에, 의사면허 취득을 위한 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학업 중에 밀드레드라는 카페 여종업원을 만나 사랑에 빠져서 그녀로 인해 유산을 탕진하던 차에 잘못된 주식투자로 전 재산을 잃고 의류회사의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부랑생활과 점원생활을 겪으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애슐리가족의 따뜻함과 진정성에 감동받는다.  숙부가 별세를 하고 그 유산으로 의사면허를 취득한 그는 인생에서의 의미를 큰 곳에서 찾기 보다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애슐리의 장녀 샐리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줄거리에서 보듯이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며, 그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트라우마(필립의 장애)를 극복해가는 과정과 인간으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게한다.  어떻게 사는 게 맞는 인생인지에 대한 정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다는 말인가?  필립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산다는 게 온통 허망하게 여겨졌다.

~노력과 결과는 전혀 맞아들지 않았다.  젊은 시절 빛나던 희망을 가졌던 대가는 쓰라린

환멸뿐이었다.  고통과 병과 불행의 비중이 너무 무겁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그는 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참한 실패를 맛보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조건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실패한다.  만사가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P(2권 363) 

 

그는 학교나 책 속에서 찾지 못했던 의미들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 둘 씩 깨우쳐 나간다.

 

자네 돈이 아니었으면 난 굶어 죽었을 걸세.~필립은 목이 메임을 느꼈다. 

노인의 삶의 투쟁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자기에게 즐거운 삶도 노인에게는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얼마만큼 알 것 같았다.」P169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인생의 십자가에 그들을 때려박는 못이 된다.」p200~201

 

「~필립이 이제 알게 된 것은, 누구든 자기에게 화가 나면 맨 먼저 그의 불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거의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필립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P425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기에 사람들은 교육, 예술, 종교를 통해 갈피없는 해답을 찾으려 애를 쓴다.  시간이 주는 우연성으로 인해 과거에 옳았던 것들이 현재에도 보편타당하게 옳은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합리적인 사고인지를 묻는 필립의 물음에 위크스는 다음처럼 답했다.

 

「사람은 자기 시대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지.  자네가 말하는 성인들은 신앙의 시대에 살았어. 

그 시대엔 오늘의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네.

-그렇다면 뭘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모르지

필립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성인들이 과거에 믿었던 것이 틀리다면, 지금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도 틀리지 말란 법이 있나요?

-동감일세

그렇다면 뭘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모르겠어」p193

 

 옳다고 판단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변하는 일이 많기에 인간은 이를 운명이라고 말한다. 

 

「~필립은 이전에 자기 나름으로 확립했던 철학을 생각하며 일종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사고하지만, 막상 행동의 순간이 닥치면 본능과 감정,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사로잡혀 무력해지고 말았다. 

마치 그는 환경과 성격이라는 두 개의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기계처럼 행동했다.」P(2권 129~130)

 

'인간'이라는 그 호칭으로 살아가는 이상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의 굴레에서 열외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필립은 빈곤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비참한 삶을 불행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의미조차도 찾지 못했기에 그들의 삶과 소통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크론쇼는 페르시아 양탄자를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말한다.  크론쇼가 죽고 난 후에도 그 말의 해답을 찾지 못했던 그는, 밀드레드로 인해 자신의 삶이 철저하게 박살난 그순간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페르시아 양탄자에 새겨진 무늬처럼 인간의 삶은 그 무늬를 새겨나가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이제 필립은 그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갖게 되어, 그는 환자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는 선도 악도 없었다.  사실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인생이었다.」P(2권 159)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몸에든 마음에든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순간 필립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자와 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맹목적인 우연의 무력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P(2권 497)

 

인간사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모두 삶이라는 양탄자의 짜여지는 큰 무늬일 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름답게 보여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답은 분명했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 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당(迷妄)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P(2권 364~367)

 

 예술가가 자신만의 심미안으로 세상을 보고 그려낸 작품 이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시각(예술가가 표현했던)으로 세상을 비춰볼 수 있는 것처럼, 비록 타인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만들어낸 삶의 양탄자는 그 나름으로의 의미를 갖는다.  필립 자신이 비참한 생활로 떨어지고 난 후, 어울린 사람들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장애(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을 얻을 수 었었던 것처럼 인간이 삶의 의미를 형이상학에 두느냐  형이하학에 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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