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여성의 삶이 조각보로 엮인 '그레이스'라는 퀼트이불을 펼쳐보다.

묭롶 2017. 11. 21. 21:55


     『그레이스』에서 작중인물 '그레이스'를 두고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그중 하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는 부류고 나머지는 그녀의 유죄를 믿는다. 

그녀의 무죄를 믿는 사람들은 어리고 판단능력이 부족한 그녀가 제임스 맥더모트의

협박에 못이겨 심실상실(기억상실)상태에서 범행현장에 있었을 뿐이라며 미국출신인

정신과 의사 사이먼박사에게 의학적 소견서 제출을 의뢰한다. 

  그들은 사이먼박사의 소견서를 근거로 그녀의 사면을 청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레이스'의 범행당시 심신상실을 의학적으로 진단하기 위해 그녀를 만난

사이먼박사는 혼란에 빠진다.  일단 그녀의 유무죄의 여부를 정신과적 상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거라 판단했던 그는  상담을 거듭할수록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미친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살인 용의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변태적인 상상이다.  하지만 살인 사건 이전에 그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살인범 살인범.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것은 매력이고 일종의 향기에 가깝다. 

온실에서 자란 치자나무.  요란하면서도 은밀한 그 무엇.

그는 그레이스를 끌어당겨 입술을 포개며 그 향기를 들이마시는 상상을 한다.

살인범.  그는 낙인처럼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댄다.」p571


  자신이 상담했던 환자에게 반해서 정해진 요일, 같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도록 최면을 걸었던

김혜수 주연 영화 <얼굴없는 미녀>의 정신과의사처럼, 사이먼은 그레이스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의식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사이먼의 경우처럼 그레이스를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살인행위(물론
무죄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자체에 대해서는 혐오를 느끼면서도 그레이스라는
여성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낀다.  사이먼박사에게 이젠 그레이스의 유죄와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이해목적의 필요의 대상으로 그녀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이제 그에게
중요한 건 혼란스러운 현재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다.


  나는 이쯤에서 궁금해졌다.  너무나 재밌어서 읽는 재미와 속도감을 동시에 제공하는 이 책에서 작가는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정신과의사와 그레이스의 면담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을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다른 작품 『눈 먼 암살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쓰는 소설에 대한 액자소설이다.  즉 액자의 틀인

작중인물 아이리스가 쓰는 소설이 실제로 드러나는 액자의 그림이 되는 방식이다.  이는 과거 신문기사의

인용배치와 더불어 어떠한 사실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마거릿 애트우드만의 독특한 작법으로

보인다.


  『그레이스』에도 이러한 신문기사는 각장의 맨 앞부분에 인용되고 있으며, 작중에서 사이먼박사는

그레이스와의 면담과정을 끊임없이 기록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는 단 한 줄도 없는 대신, 사이먼박사가 면담을 통해 느끼는 감정의 묘사가 면담장면의 대부분을

채운다는 점이다.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타인의 정신세계(내면)를 진단하는 정신과의사(사이먼)가

실제로 면담의 과정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그레이스의 내면이 아닌 바로 사이먼 자신의 내면이란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사이먼박사의 면담은 그레이스의 내면에 다가갈 수 없다.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레이스의 외면(외형성)일 뿐이다.  사이먼의 상담과정은 어쩌면 타인에 의해 언제나 '대상'(외형)이

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위치를 상징하는 하나의 장치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레이스의 사면을 위해

노력하는 베링거 목사와의 로맨스나, 제러마이어와의 모험담이 아닌 사이먼 조던 박사가 남자주연을 맡지

않았을까?


  『그레이스』의 작중배경인 1800년대 중반에서 현재까지 오랜시간이 흘렀지만 여성을 외형적 대상으로

고정하는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여성의 위치는 언제나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판단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이먼이 그레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조그만 일부분도 알아낼 수

없었던 것처럼, 한 명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나자신'이 투영됨으로써 그 모습에 덧씌워진

반사된 '나'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레이스를 둘러싼 주변인들이 느끼는 감정보다는 그레이스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의 필연성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술과 도박에 빠진 아버지와
밑으로 줄줄이 동생들이 딸린 그레이스에게 자신의 현존과 타인의 생명에 대해 느끼는 가치는
형편없을 수 밖에 없다. 


  어머니가 또 동생을 낳자 아버지는 그냥 가만히 코를 잡고 있다가 조그마한 구덩이에 내다버리라고

말했다.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 밑으로 딸린 동생들을 데리고 바닷가 선창에 줄줄이 앉아있을때 그레이스는

그중 몇을 바다에 밀어넣으면 정말로 입이 줄어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가치를 잃고 동물적 생존의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와 인간성을 운운할 수 있을까?
그런 입장에 놓인 처지라면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상황과 다를게 없지 않을까?
실제로 작중인물인 메리휘트니는 결혼하지 않은 그것도 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갖게 되자, 현재 집에서
쫓겨나게 되면 자신은 선원들을 상대로 몸을 팔다 일년안에 죽게될거란 생각에 불법낙태를 선택했다
죽게되었다.  그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를 갖게 한 아이아버지도
불법시술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의사도 일말의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오직 그레이스 만이
그녀를 기억할 뿐이다. 


「저는 이 천국의 나무의 가장자리에 서로 뒤엉킨 뱀들을 넣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덩굴이나 밧줄 무늬로 보이겠지만, 아주 작게

눈도 만들 테니 저한테는 뱀으로 보이겠죠. 

~하지만 나무를 이루는 삼각형 조각들 중에서 세 개만큼은

다른 색으로 만들 거예요.  하나는 메리 휘트니한테 받은 페티코트의

흰색이 될 테고, 또 하나는 제가 밖으로 나올 때 기념품으로 달라고

간청해서 얻은 교도소 잠옷의 누런색이 될 거예요.

그리고 남은 하나는 분홍색과 하얀색의 꽃무늬가 있는 엷은 무명천으로

만들 거예요.  제가 처음 키니어 나리 댁으로 찾아간 날 낸시가

입고 있었고 제가 배를 타고 루이스턴으로 도망갔을때

입었던 드레스에서 잘라 낸 천으로 만들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겠죠.」P669~670


  작품의 마지막에 사면되어 감옥을 나와 미국에 정착한 그레이스는 자신이 만드는 퀼트의 조각의
세 부분을 '자신'과 '메리 휘트니'와 '낸시 몽고메리'의 기억의 조각으로 채우겠다고 말한다.
  시대와 다른 사람들의 망각과 무관심 속에 죽어간 많은 여성들을 상징하는 이 세 인물들로 만들어지는
퀼트는 어찌보면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가야하는 모든 여성에게 보내는 선물이자 위안과도 같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다른 소설 <눈 먼 암살자>에서 자신의 손녀 사브리나에게 전해주기 위해
소설을 쓰는 작중인물 아이리스처럼 '그레이스'는 남성에 의해서 대상화되고 사회에선 권리를
외면당하고 책임을 강요당하는 모든 여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자기가 각본을 미리 준비해 놓고 상대방의 입안으로

쑤셔 넣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박람회나 품평회에서

복화술을 보여 주는 마술사와 같고, 그들 앞에서 나는 그저 나무 인형일 뿐이다. 

재판정에서도 마찬가지라, 나는 피고석에 앉아 있었지만

사기로 된 머리를 달고 안에 솜을 넣은 천 인형에 다름없었다.

나는 나라는 그 인형 속에 갇혀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p433~434


 다만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아이리스가 처한 상황에 대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성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몫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