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마거릿 애트우드>

<눈먼 암살자>소설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다.

묭롶 2014. 12. 15. 23:00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을 깨우친 이후로 글자는 읽어왔지만, 내가 '읽는다'의 의미를 이해한 건 중학교 1학년 때

어느 봄날이었다.  새로 입학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나에게 관심을 갖는 이도 없던 그때, 점심시간에 난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수집된 학급문고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수업에 흥미를 갖지도 못한 터라 그냥 오후 수업시간에 심실풀이할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李箱의 『날개』를 만났다.  『날개』를 읽으며 난 어느순간 교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육체는 교실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내 정신은 『날개』의 소설 속 세계에

속해 있었다.  이전까지 내 삶 속에서 의식하지 못했던 '나'라는 자아를 소설의 읽기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자신의 의지대로 정상과 상상을 오갈 수 없었지만, 난 소설읽기라는 문을 열면 현재가 아닌

다른 세계로 넘어갈수 있었다.  소설은 '읽는다'는 단순히 활자를 본다는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읽는 행위를 통해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포괄적인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사실 또한 내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후 나는 틈만 나면 '소설

읽기'에 빠져들었다.  나의 현재가 어떠하든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 환상처럼 소설읽기는 나에게 비밀통로가 되어주었다.

 

 나의 독서에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다.  읽다가 궁금해지는 무언가를 찾아 읽을 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이 특이하다

싶은 책들도 나의 독서목록에 추가되는데 『눈먼 암살자』는 제목이 맘에 들어 택한 책이다.  사전 정보 없이 제목 만으로

접한 책이 어린 시절 나를 '소설읽기'로 이끌었던 놀라운 책 『날개』처럼 흥미진진한 소설 읽기의 세계로 인도했다.

『눈먼 암살자』만큼 소설읽기의 장점을 고루 갖춘 책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은 팔순을 넘긴 작중인물 아이리스가 쓰는 회고록을 통해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총체성을 드러낸다.  작중인물

아이리스 자신조차도 자각할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이 글쓰기를 통해 사라지지 않을 아우라(고유성)를 만들어낸다.  피에타의

조각상이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위로와 감명을 전하는 것처럼 자신의 손녀인 사브리나를 위해 적는 회고록은

무수히 많은 시간과 좋은 가르침보다도 효과적으로 한 사람의 삶을 진정성 있게 전달한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책을

왼손잡이의 책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읽지 않을 것을 가정하며 쓴 책,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지켜본 타인의 입장에서 기록하는 방식을 두고 오른손이 알지 못하는 왼손의 자동기술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등장한다.  아이리스와 알렉스 토마스(아이리스의 연인), 로라(아이리스의 동생)가 그들이다.

먼저 아이리스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의지대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유형이며, 알렉스 토마스는 자아의

이상을 위해 현실을 포기한 인물로, 로라는 현재에 발 붙이지 못하고 자아의 눈으로 현재를 재해석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점은 아이리스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소설 『눈먼 암살자』에 등장하는 카펫트(직조물)처럼 전혀 다른 세 유형의

삶을 회고록에 등장하는 소설과 기사를 통해 병합해냄으로써 통일성 있는 의미를 건져올린 다는 점이다.

 

 삶은 가본 적 없는 길을 걷는 여정이다.  한 땀 한 땀 뜬 뜨게질이 완성이 되야 전체적인 무늬의 모양을 알 수 있듯이 누구도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삶의 총체성을 확인할 수 없다.  작중인물 아이리스는 회고록 속에서 자신보다 먼저 죽음을

맞은 로라와 알렉스 토마스의 삶을 건져올리는 과정을 통해 다시 자신의 자아를 이해하고 만나게 된다. 

『눈먼 암살자』는 작중인물 아이리스가 자신의 손녀인 사브리나에게 전하는 이야기이지만, 실은 삶의 과정 중에 있는

어느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든 자신을 향한 이해와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이

중요하단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