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1Q84>3권을 읽고 느꼈던 불안감을 다시 느끼다.

묭롶 2017. 8. 27. 13:03




  내가 좋아하는 밴드 로맨틱펀치의 보컬이 망막박리로 긴급수술을 받게 되어 잡혀있던 공연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었다.  로맨틱펀치라는 밴드를 작년 9월 4일 만난 후로 내 삶에 큰 축을 형성한 밴드를 당분간

보지 못한다는 허탈감과 상실감이 상당했다.  공연이 없는 주말의 허한 마음을 달래는데 두꺼운 책을 읽는 건

적당한 선택 같았다.  1권과 2권을 합쳐 천이백 페이지에 달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글의 특징인 몰입감과

속도감이 나를 이끌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징대학살과 관련해 일본 우익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기사 내용이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물론 다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처럼 이 책은 엄청 잘 읽힌다.  시원하게 원샷으로 들이마시는 맥주처럼

멀리서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급류를 지켜보는 것처럼, 이번에도 책장은 거침없이 넘어갔다.  그러면서 2권의

마지막이 얼마남지 않은 페이지를 남겨두고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흡사 2009년에 읽었던 하루키의『1Q84』1, 2권을 읽고 난 후 엄청난 흥분의 후폭풍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던 내가 『1Q84』3권을 예약 주문하고 기다림 끝에 받아 읽고 느꼈던 실망감이 다시 떠올랐다.

2010년 『1Q84』3권을 읽고 남긴 후기의 일부분이다.


PS:  <1Q84> 인물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들 모두가 타인과 소통하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그들 자신의 의지(삶에 대한 희망)를 갖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 그 순간조차도,

타인의 의지(고마쓰의 의지대로 고스트 라이터가 된 덴고,

아자부의 노부인의 의지대로 청부살인을 하는 아오마메,

NHK회사의 의도대로 평생을 산 덴고의 아버지 등)에 의해

행동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욕구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어떤 존재들(리틀 피플 등)의

 의도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현대인들의 주체적 의식은 약화되고

그 대신 현대인들을 잠식해 들어가는 의지들(사회적 의지, 집단 무의식 등)은

영향력을 키워가기 때문이다.  그런 주체성 약화가 가져오는

비극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데 단초가 됐던 일본 옴진리교의 지하철 테러만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체성 없는 현대인에게 어떠한 부정한 의도의 의지가 주입됐을 경우

인간 아바타들이 행하게 될 참상이 예견되는 듯 하다. 

어쩌면 마더와 도터라 불리는 1Q84 세계의 두개의 달은 분리되고 변이돼버린 현대인의

또 다른 인격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의 분리와 고립현상을 보여주는 <1Q84>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되묻게 된다.   


  물론 책이 꼭 결론을 내야한다는 의무는 없다.  동화책처럼 그렇게 되서 주인공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독자는 독서를 통해 얻어지는 하나의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의

세계를 기대한다.  그런데 『기시단장 죽이기』라는 책이 작중에서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의 이데아(기사단장)에 영향(메타포)을 받아 '나'라는 작중인물이 그린 그림이<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초상이듯이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이『1Q84』의 번외버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먼저 여기에서 인류 이전부터 지적활동을 하는 생물체(인간의 등장 전에는 돌고래)에 접근해온 이데아라는

존재는 <1Q84>의 리틀피플과 닮은꼴이다.  등장하는 인물들마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며

타인과의 교류를 멀리하는 자기선택형 외톨이들이다.  또 공통적으로 이들은 자기자신의 삶의 목적을 스스로의

삶의 과정에서 찾지 못한다. 작중인물이 이혼이 진행중인 아내와 성교를 하는 꿈을 꾼 후, 우연히 같은 시기에

임신한 아내는 <1Q84>에서 아오마메의 임신을 연상시키고 아키가와 마리에의 아버지가 빠진 신흥종교는

 <1Q84>의 종교단체 선구를 연상시키며 작중인물 앞에 나타나는 이데아인 기사단장은 리틀피플을 연상시킨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어본 일 있나?"

~"흥미로운 책이야.  ~역사의 어느 시기, 한참 옛날의 고대 무렵이지만,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왕은 임기가 종료되면 살해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어.

~임기가 종료되면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참살했어.

~어째서 왕은 살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 시대에는 왕이란

사람들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듣는 자'였기 때문이야.

~그런 자들이 자진해서 그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회로가 되었던 게야.

~지상에 살아 있는 자들의 의식과 리틀 피플이 발휘하는 능력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야.」『1Q84』2권 P284~285


「"그래서 당신은 지금, 여기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죠?"

기사단장이 말했다.  "나는 제군이 제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지금 제군을 보내줄 수 있네.  하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야.

적잖은 희생과 가혹한 시련이 다르거든.  구체적으로 말해

희생하는 건 이데아고 시련을 겪는 건 제군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대체 뭔가요?"

"간단해.  나를 죽이면 되네."  기사단장이 말했다.」 

『기사단장 죽이기』2권 P339

  『1Q84』에서 리시버의 역할을 마친 마스터를 살해하는 아오마메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실종된 마리에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기사단장을 살해하는 작중인물과

닮은꼴이다.  이 책은 인간세계에 개입하려는 이데아(퍼시버)가 듣는 자 작중인물(리시버)을 만나

원래의 의지(이데아)는 소멸하고 전이된 메타포(행동)를 통해 뭔가를 이뤄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실 작중에서 '퍼시버'의 의지가 봉인되어 담긴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의 자살한 막내동생 이야기는 사족으로 느껴진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겉도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여겨지는 것이다.  어쩌면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부분에 걸었던 내 기대가 컸던

탓인듯 싶다.


  이 책이 기나긴 페이지를 할애하여 전하는 메세지는 한 가지다.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개입하는 의지(이데아: 퍼시버) 앞에 그것을 실체화(메타포)시키는 인간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다.

원래의 의지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지만 그걸 실체화 하는 순간 리시버에 의해 행동의 결과는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작중인물 '나'와 '멘시키'의 대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내 해석이 너무

거칠은 탓도 있지만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과대포장된 결과물이 이번 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PS: 책을 읽고 충족되지 않는 호기심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첫째로 하루키는 『1Q84』4권을

왜 쓰지 않았을까?  둘째 멘시키 집에 숨어있던 마리에는 큰 위험 요인이 없어보였는데, 기사단장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작중인물에게 '살인'을 부추긴 것일까?  셋째, 마리에가 숨어 있을때

벽장 앞에 서 있던 것이 정체는 무엇일까?  넷째, 기사단장의 얘기처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진실로

받아들이며 사는 게 정답일까?


PS2: 어쩌면 기사단장은 작중인물 아마다 도모히코가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의지를 담아 만들어낸

의지의 산물이므로 자신 대신 그 의지를 실체화 할 대상을 작중인물로 삼아 그걸 완성했기에

스스로 소멸을 택한 것이 아닐까?  결국 마리에는 그 행동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작중인물은 멘시키에게도 아마다 도모히코에게도 이용당했다는 결론이 나는 걸까?   


PS3: 사실은 마리에를 구한다는 목적을 위해 기사단장을 살인하는 작중인물의 모습을 보면서

강압에 의해서 였지만 난징대학살 당시 포로의 목을 그어야 했던 아마다의 막내동생의 입장을

합리화하는것 같아 많이 불편했다.  시대를 떠나 합목적적 아니 허락된 살인은 죄의식 없이

가능한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불편한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