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무라카미 하루키>

<1Q84 3권> 사족인가? 4권을 위한 과정인가?

묭롶 2010. 8. 4. 23:30

 

 하루키는 <1Q84>1, 2권이 바하의 클라비어 평균율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1Q84> 1권과 2권은 덴고와 아오마메, 그리고 '1984'와 '1Q84', '마더'와 '도터', '리시버'와 '퍼시버', 작용과 반작용, '의식'과 '리틀 피플' 간의 얽히고 설킨 복잡한 이중주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의 긴박감과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독자에게 선사했다.

 

  <1Q84>2권에서 아오마메는 자신이 덴고(새로운 리시버로서의 기능을 부여받은)에게 1Q84의 세계속에서 반작용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깨닫고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과 동시에 다른 공간인 아버지의 병실에서 공기번데기에 싸인 아오마메를 보게 되는 덴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작품이 마무리 되었다.  <1Q84>1,2권은 소설적 미학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부분(읽는 재미, 참신한 상상력, 잘 짜여진 소설적 구조물을 보는 즐거움 등)을 발견하게 해 주었지만, 그중 특히 열린 결말을 통한 여운을 남겼다는 점에서 작품을 읽고 난 후 오랜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황순원의 <소나기>와 알퐁스 도테의 <별>을 읽고 느꼈던 가슴 아련한 파동을 오랫만에 느끼게 되었다.  열린 결말 속에서 나는 이후 이야기를 상상하며  공기번데기에 감싸인 아오마메의 모습 속에서 1Q84의 세계에 아오마메가 들어오게 된 전말에 리틀피플의 의지가 개입했음을 깨닫게 되었고, 1Q84의 공간속에서 소멸된 그녀가 1984년의 세계에서 새로운 리시버의 역할을 보여받은 덴고의 도터가 되지 않을까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어딘가에서도 리틀 피플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시켜 나가는 것을 아닐까라는 상상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즐거운 상상은 너무나 친절하게 돌아온 <1Q84> 3권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해변의 카프카>를 되돌이켜 보아도 이번 3권은 하루키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인다.

  소설은 독서의 과정 중 독자의 상상력이 작품의 이야기와 결부되어서 고유한 감수성(독서의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영화와는 다르게 작품에 개입하는 독자의 역할이 큰 장르이다. 

  3권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점은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될 틈도 주지 않고(물론 이 작품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 삼의 목소리가 너무나 친절히 개입하여 각각의 인물들의 심리상태 및 전개과정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설명이 너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바람에 중간에 읽다가 힘이 풀리는 장면이 여러곳에서 발견되었다.

 

「아오마메가 그 순간에 목격한 것은 물론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우시카와였다.  조금 더 환한 곳이었다면, 혹은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다면 그 크기가 소년의 머리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당연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키 작은 후쿠스케 머리가 다마루가 지적했던 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오마메가 그의 모습을 목격한 건 불과 몇초였고, 바라본 각도도 완전하지 못했다.  또한 다행스럽게도 똑같은 이유에서 우시카와 역시 베란다에 나와 있는 아오마메의 모습을 눈치 채지 못했다.  여기서 몇 가지 '만일'이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만일 다마루가 이야기를 조금 더 짧게 끝냈더라면, 만일 아오마메가 그 뒤 뭔가 생각에 잠겨 코코아를 끓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미끄럼틀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덴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아오마메가 덴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게 불운이었는지 아니면 행운이었는지, 그건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P414~415

=> 이 장면을 꼭 이리 길게 설명(고립감을 느끼는 우시카와의 심리를 반복 묘사한 부분도 마찬가지)을 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 '만일'이라는 부분을 꼭 화자가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1권과 2권에서 보여진 안정적인 형태의 이중주는 3권에 이르러 곳곳에서 불협화음을드러낸다.  첫째, 각자 인식하지 못한 채 별 불편없이 살던 덴고와 아오마메가 갑자기 서로를 너무나 그리워하며 찾게 된다는 점, 둘째, 후카에리의 갑작스런 퇴장과 종교단체 선구의 갑작스런 입장변화에 대한 개연성 부족, 셋째, 리틀 피플들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필요목적을 갖는 존재(아오마메의 아이)를 놓치게 되는 점 등은 의구심을 품게한다. 

  클라비아 평균율의 이중주는 3권에 이르러 '우시카와'라는 인물이 포함된 변주의 형태를 보인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각자 삶을 살다가 2권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상대방을 각인하게 되고, 그러한 그들을 이어주기 위한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 '우시카와'이다.  그는 또한 작품 속에서 서로 다른 플롯으로 연주되던 (후카에리의 고스트 라이더로서의 덴고와 이자부의 노부인의 의뢰를 받아 선구의 리더를 청부살해하는 아오마메) 이중주를 하나의 합주(덴고와 아오마메)로 만들기 위한 전주곡(프렐류드)의 형태를 보인다.

  그래서 '우시카와'로 분류된 장들을 한데 모으면 다른 선율의 이중주가 합주곡으로 넘어가기 전 단계의 프렐류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맞은 우시카와의 입 속에서 하나씩 나와 다시금 공기번데기를 짓는 리틀피플의 모습 속에서 그의 행동이 자의적인 것이 아닌 리틀 피플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실 이 책의 화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리틀 피플은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화자가 리틀 피플이라는 가정하에서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입밖에 내지 않은 마음 속의 숨겨진 의도까지도 미리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기에 아오마메와 덴고 사이에서 새로운 도터(강력한 영매)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위해 1Q84라는 공간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에요."  아오마메는 말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내 뱃속에 있는 아이겠죠.  그들이 어느 시점엔가 그걸 알아낸 거에요."

"호우호우."  리듬을 맞추는 역할의 리틀 피플이 어딘가에서 소리를 높인다. 」P642

 

  그런 가정하에 <1Q84 3권>은 덴고와 아오마메가 맺어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이후 <1Q84 4권>에서의 리틀피플의 본격적인 활동과 의지의 실현을 예고하는 건 아닐까?  물론 이 부분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현재 구체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4권 출판을 부정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4권이 나올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 이 3권의 마무리는 오히려 2권으로의 끝맺음보다도 훨씬 개연성이 떨어지고 소설적 완성도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3권의 이해불가능한 문장들은 4권을 통해 납득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PS:  <1Q84> 인물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들 모두가 타인과 소통하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그들 자신의 의지(삶에 대한 희망)를 갖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 그 순간조차도, 타인의 의지(고마쓰의 의지대로 고스트 라이터가 된 덴고, 아자부의 노부인의 의지대로 청부살인을 하는 아오마메, NHK회사의 의도대로 평생을 산 덴고의 아버지 등)에 의해 행동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욕구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어떤 존재들(리틀 피플 등)의 의도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현대인들의 주체적 의식은 약화되고 그 대신 현대인들을 잠식해들어가는 의지들(사회적 의지, 집단 무의식 등)은 영향력을 키워가기 때문이다.  그런 주체성 약화가 가져오는 비극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데 단초가 됐던 일본 옴진리교의 지하철 테러만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체성 없는 현대인에게 어떠한 부정한 의도의 의지가 주입됐을 경우 인간 아바타들이 행하게 될 참상이 예견되는 듯 하다.  어쩌면 마더와 도터라 불리는 1Q84 세계의 두개의 달은 분리되고 변이돼버린 현대인의 또 다른 인격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의 분리와 고립현상을 보여주는 <1Q84>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