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속에 숨어 있는 하이퍼텍스트성

묭롶 2009. 2. 17. 23:25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소설로서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작중인물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정신세계의 변천사를 독자에게 펼쳐보인다.  사실 제목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지만 그 초상은 자화상(自畵像)이 아닌 자아상(自我像)에 가까워 보인다.  어린시절 막연하게만 여겨졌던 자신의 실체를 찾아가는 작가의 정신적 변천사를 읽는 독서의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유년기->클롱고우스 우드 학창생활->아버지 파산 후의 방황->벨비디어 학교에서의 생활->대학생활로 분류되어 있으나, 실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작가의 정신세계는 이곳 저곳에 흩어진 에피소드들로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어떠한 에피소드는 그 하부에 다른 사건들을 내포 하는 데 이는 흡사 하이퍼링크된 단어를 클릭했을 때, 그 단어에 해당된 내용들을 보여주는 하이퍼텍스트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작가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담아내려했던 작가의 의도적 기법으로 이런 특징으로 인해 이 작품이 모더니즘 소설의 초창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하나의 기억은 그 기억에 얽힌 에피소드들로 구성이 되는 것이기에, 특정한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여러개의 에피소드(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물다가 앞니가 부러진 사람은 사과를 떠올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가 빠졌던 기억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렇기에 기억의 편린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비유와 상징과 예시로 가득차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P18~19

<>-원래는 SUCK:학생들 사이의 은어로 '아첨꾼', '빨다'라는 뜻을 가지지만 여기에서는 아첨꾼이란 뜻으로 쓰인다.  '썩'이란 단어는 낱말이지만 스티븐에게는 위클로 호텔의 화장실의 세면대 바닥에 있는 구멍으로 더러운 물이 '썩'(의성어)하고 내려갔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서 '썩'은 현재 교실에 있는 스티븐을 과거의 사건과 연결짓는 하이퍼텍스트적 기능을 갖는다. 

 

그의 육체는 성소를 받아들이겠느냐며 권유하는 교장과 함께 교장실에 있었으나, 정신은 <가면을 쓴 기억들>이라는 텍스트로 링크된 기억 속의 클롱고우스의 운동장에 있었다.  또한 <가면을 쓴 기억들>은 P245의 <흉내>와도 연결된다.

P243

「교장의 말이 스티븐의 뺨에 지폈던 작은 불길은 다시 가라앉고 그의 눈은 여전히 색깔 잃은

하늘만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가면을 쓴 기억들>이 그의 앞을 재빨리 스쳐갔다. 

~그는 클롱고우스에서 운동장을 오락가락하면서 운동시합을 구경하고 있거나 또는 크리켓 모자에서

사탕을 끄집어내어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P245

「~명상을 통해 체험해 온 그 희미한 사제 생활에서, 그는 여러 명의 사제들에게서

그간 주목했던 목소리와 몸짓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

P249

「~그가 그런 생활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미묘한 적대적 본능을

발동시키면서 묵종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생활의 냉기와 질서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베일에 싸인 채 희미하게 짐작되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까지 그의 삶은 <가면을 쓴 기억들>과 타인의 삶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기에, 그는 계시처럼 주어진 삶의 목표를 찾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기유배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자기유배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이 쓰고 있는 언어(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언어)에서 오는 자괴감과 혼란 때문이다.

 

P312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택했어.'  스티븐이 말했다.

'그들은 소수의 외국인들이 자기네를 예속하는 것을 허용했던 거야. 

그들이 진 빚을 내가 내 삶과 몸을 바쳐같을 것 같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니?'」

 

스티븐은 자국어 대신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예속하는 영국인의 영어로 말해야하는 자신의 현 상황에 좌절감을 느낀다.  그에게 세상을 인식하는 장치인 언어적 프리즘이 침략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은 그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 혼란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언어체계가 아닌 자신의 몸으로 기꺼이 체험해서 자신의 기억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언어적 프리즘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이 제임스 조이스가 자기유배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이지 않았을까?

 

P319

'예술이란 말이야'  스티븐이 말했다. 

'미적인 목표를 위해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지.'」

                     위의 말을 바꿔말한다면 ->참된 진리를 위해 언어적 프리즘으로 보여진 세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육화하기 위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특징적인 면모는 같은 문장의 반복적 변화와 단어(낱말)에 대한 예민한 인식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약한 시력 탓에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는 다른 안목으로 세계를 인식했다.  그는 정상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시력 대신에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감수성이 타인에 비해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느낀 감수성의 세계를 그는 언어적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하는데서 큰 기쁨을 느꼈고, 그렇게 재구성된 세계를 통해  그의 정신세계는 그 영역을 넓혀갔다.

 

P27~28

<그는 몸을 떨었고 하품을 했다.->그는 몸을 떨었고 하품이 났다.->그의 몸은 조금 떨리고 있었고 여전히 하품이 났다.>

  이는 몸에 한기가 들고 아픈 스티븐이 차가운 침대시트 속에서 애써 잠을 청하는 위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문장이 비슷하게 계속되는 이유는 스티븐이 현실 세계를 어린시절부터 이미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장치로 보여진다.  '그는 잠들기 위해 애를 썼다'라는 평범한 문장이 아니라 '잠들기 위해 계속해서 몸을 떨고 하품을 하는 그의 육체'가 그의 상태를 직유가 아닌 비유를 통해 서술하는 것이다. 

 

P35

<배앓이 collywobbles라면 마이클 수사(修士 )에게 달려가야겠구나.

  ~배앓이를 하는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쩔쩔매야 wobble하는 법이라고!>

 

P257

「~마음이 수줍은 데 못지않게 시력마저 약한 그가 언어의 프리즘을 통해

여러 색깔로 화려한 층을 이루며 반영되는 밝은 지각 세계보다도,

명료하고 유연한 문장으로 된 산문 속에 완벽히 반영된 개별 정서의

내면젹 세계를 명상하는 데서 더 많은 기쁨을 얻고 있었을까?」

 

P56의 단티에 대한 기억은 성모를 떠올리게 하고 성모를 상징하는 '상아탑'이라는 단어는 아일린의 손을

떠올리게 한다. 

<상아탑>-아일린의 길고 희고 가늘고 차고 부드러운 손에 대한 기억

     ↓

P67- 손톱을 늘 다듬고 있는 사이먼 무넌을 레이디 보일이라고 놀리는 친구들로 인해 스티븐은 아일린의 손을

떠올린다.  아일린의 손은 다시금 상아탑이라는 단어를 상기하게 하면서 P56의 성모마리아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레이디 보일의 손톱>

     ↓

P56

<아일린의 길고  가늘고 싸늘하고 하얀 색의 손>

     ↓

<성모마리아>

이러한 기억의 순환고리는 현실세계에 위치하고 있지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그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더불어 이 작품이 기존의 작품의 서사성의 굴레를 벗어난 작품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가 처한 정치·종교적 특수성에서 오는 혼란으로 인해 자신의 실존성을 현실세계와 정신세계로 나누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육체는 현실에 얽메어 있을 지라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는 그가 가야할 삶의 목표가 어떤 것인가를 계시처럼 제시한다. 

P102 「~그는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인도하고 있던 어떤 예감은 그가 공공연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결국 그 이미지와 마주칠 수 있을 것임을 말해 주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3인칭의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작중 인물의 심리상태에 대한 관찰자가 3인칭의 서술작 아닌 작중 인물(1인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특징을 갖는다.  이 특징으로 인해 이 작품은 과거의 작품들과의 경계선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기존의 작품들이 3인칭 관찰자에 의한 서사물이었다면 이 작품은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의 형태를 띤다) 

 

  「~그는 중죄를 지을 만한 유혹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복잡한 신앙 생활과 자제의 과정이 끝난 후에도 유치하고

자기답지 않은 결함에 쉽사리 빠지곤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P235

「~어떤 순간적인 생각에서 그가 단 한 번만 동의하면 그 동안 이루어놓은 것을

모두 허물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자기에게는 힘이 있다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P237

위 글을 '그'라고 3인칭으로 지칭하고 있으나 이를 '나'(1인칭)로 바꾸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