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똘스또이,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다.

묭롶 2018. 11. 26. 21:53

  이년 전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새벽 출근길에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근교의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나는 1차선을

주행중이었는데, 주유소에서 주유를 마친 차량이 저속인 상태로 곧바로

1차선으로 진입해서 내 차를 들이받았다.


  설마 주유소에서 저속으로 나온 차량이 그대로 2차선을 거쳐 대각선으로

1차선을 진입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나는 설마하는 순간 내차 옆면에

부딪혀 오는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순간 이대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찰나의

시간동안 나는 죽음 비슷한 무언가를 경험한것 같았다.  내가 만난 죽음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였다.  소리도 빛도 색깔도 냄새도 심지어 나조차 없는

그곳이 바로 내가 느낀 죽음이었다. 


  이미 수많은 매체를 통해 의가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들려준 자신의 영혼이

자기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거나 어딘가에서 밝은 빛이 비췄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가 경험한 그 순간은 내가 그전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하는데

나는 그 순간 나라는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육체에서 정신을 지워내버린 공허와도 같았달까.


  그 짧은 무(無)의 순간이 나를 스쳐간 후 다시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인식할 수 있었다.

처참하게 오른쪽이 완전히 부서진 내차를 갓길에 세운 후 사고처리를 위해 나온 보험회사 직원이 내게 병원입원 여부를

물어왔을 때 나는 "지금 냉장고에 명절 장 봐 놓은게 한가득인데 어떻게 병원을 가요?"라고 답했다.  죽다 살았는데

기껏 냉장고에 있는 고기며 생선을 떠올리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지만 그게 내 삶의 중요한 부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 이반 일리치라는 판사가 있다.  그는 고위 공직자였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탈한 학창시절을 거쳐

무난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자신에게 어울릴 법한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그 낳은 아이들 중 일부를

잃었고 상류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의혹에 멈칫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직무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 믿었다.


「  하지만 이반 일리치 자신은 카이사르도 아니고 일반적인 보통 사람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남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카이사르가 어떻게 어머니의 손에 나처럼 입 맞출 수 있을 것이며,

카이사르가 어떻게 어머니의 사각거리는 비단 옷자락을 나처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카이사르는 인간이었고 따라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 p72


  하지만 원인모를 질병이 태옆을 감은 인형처럼 앞으로만 내달리던 그의 삶에 발목을 걸어 그를 거꾸러뜨렸다. 

삶의 경주에서 열외된채 질병의 통증 속에서 여전히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의

동료를 지켜봐야만하는 이반 일리치는 그들에게 강한 증오를 느꼈다.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p102~103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시시각각 자신의 삶을 갉아먹어 들어오는 통증의 강도와 빈도의 증가를 느끼며

이반 일리치는 설마 이대로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과 허탈감 그리고 배신감에 몸부림 친다.

살고자 하는 그의 희망을 켜자마자 불어서 꺼버린 촛불처럼 통증으로 짓밟는 죽음의 존재감 앞에 무력함을

느끼는 이반 일리치는 문득 자신이 느끼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결국 자신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숨을 거두지만 그의 죽음을 책을 통해 지켜본 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p119


  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저자인 레프 톨스토이를 어린시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처음 만났다.

어린시절 막연하게 느꼈던 '죽음'(『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땅을 얻기 위해 달리다가 죽어 겨우 한 평 남짓한

땅에 묻힌 사내)과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연배의 '죽음'(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속의

'죽음'을 통해 나는 결국 똘스또이가 그 모든 죽음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가 하나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게 옳은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물론 정답은 없다.  정답은

각자 저마다의 삶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자신의 몫일 뿐이다.  '나 다운 삶' ,'나 답게 사는 삶'을 거론하기 힘든

반복되고 규격화된 삶 속에서 그래도 지금 가는 길이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걸 대신 말해줄 수

있는게 어쩌면 문학의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똘스또이의 작품을 읽으며 다시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