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레프 톨스토이>

<안나 까레니나>'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의 출발점

묭롶 2014. 6. 8. 18:22

 

 

 

  어릴 때 톨스토이의 단편소설모음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인상깊게 읽었다. 

악마를 이긴 바보 이반과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얻는 과정,

농부가 해지기 전에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달렸다가 결국은 죽어서 한평도

안되는 땅에 묻히는 이야기 등은 나에게 뭔가 교훈적으로 다가왔다. 

그 시절 나는 막연히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잠시 들었던 것 같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단편집은 『안나 까레니나』 단행본

발표 1년 후인 1879년에 발표되었다.  나는 『안나 까레니나』를 읽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의 출발점이 바로 이 책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발표 시기는 중세 봉건 농노제와 왕정이 붕괴되어 가던 혼란의 시기였다. 

 

  중세인간의 삶은 자신의 출생 신분에 따라 사회와 종교가 정한 룰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수동적 삶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중세시대에도 문제적 인물군이 없진 않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짓고 고민하기 보다는 주어진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되었다.  신분제와 성별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서 오는 불만은

종교적 숙명과 운명론 속에 체념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합리와 부조리한 현재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나 시도조차 한 적이 

없는데 삶을 규정지었던 제도와 종교가 힘을 잃어버렸다.  이때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며 초인의 개념을 들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인간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바 있다.  유럽에 비해 중세의 붕괴가 상대적으로 늦었던 러시아의 지식층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바를 그들 자신조차 찾지 못하는 혼란에 빠졌다. 

 

 

「'만약 내가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해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떠한 해답을 인정해야 할 것인가?'

그는 자기 신념의 저장고를 샅샅이 뒤져도 해답은커녕

그에 유사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기를 위해서 부지불식간에 온갖 책, 온갖 회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태도와 그 해답을 찾고 있었다. 

이때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하고 어지럽혔던 것은 그의 계급,

그의 연령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전의 신앙을 새로운 신념과 바꾼 뒤에도 그에대해서

아무런 불행도 발견하지 못하고 충분히 만족하며

 유연히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3권 p465

 

  톨스토이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의

삶 속에서 찾고자 한다.  『안나 까레니나』의 전지적작가 시점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중을 반영하고는 장치이다.  이 작품은 크게 구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인 스테판과 알렉세이, 그리고 그 반대편에 안나와 레빈을 놓는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체제의 혼란과 붕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과거와

동일하게 이어나간다면, 체제 혼란을 본인의 자유의지 표출로 드러낸 안나의 삶은 

위태로워 보인다.   구체제의 제도를 고정관념처럼 지니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향한 자유의지를 동시에 가진 인물 레빈이 겪는 혼란과 괴리감은 톨스토이가 느끼는

감정상태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안나 까레니나』는 안나와 레빈 등 인물들의 심리를 전지저 작가 시점으로 관찰한다.

독서의 과정중 관찰자의 시점은 어느순간 작가에서 레빈으로 이동한다. 이는 어쩌면

죽음으로써 자신의 혼란을 매듭지었던 안나와 끊임없는 혼란 속에서 죽음의 유혹을

느끼면서도 살아야 하는 목적을 찾고자 하는 레빈을 대비하기 위한 극적인

장치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중층적 의미를 지닌다 안나는 출산 후유증으로 죽음의 위기를

경험한 후 자신의 배경이 되었던 제공하는 삶(수동적)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했다고 믿었던 새로운 삶이 자유가 아닌

배경만 알렉세이(까레닌)에서 브론스키로 바뀐 허상이었음을 인식하고 그 허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난 마치 먹을 것이 주어진 굶주린 사람과도 같아요. 

물론 그 사람은 추울지도 몰라요.

옷이 찢어지기도 했을 거고 또 부끄러울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불행하지는 않아요.

내가 불행하다구요? 아네요. 이것이 바로 내 행복이에요......."」1권 P376=>

 

「'내 사랑은 차츰 열정적이고 이기적으로 되어가는데

그이의 사랑은 점점 식어가고 있다.

~우리들은 말하자면 결합될 때까지는 양쪽에서 서로에게 접근하였지만,

그러고 나서는 억누를 수 없는 기세로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가버렸던 것이다. 」3권 p417

 

 

  허상뿐인 현재를 죽음으로 끝내버린 안나와 달리 죽음의 유혹을 느끼는 레빈은 수동적

죽음이 아닌 능동을 그 안에서 희망한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반작용을 삶의 활력으로

이용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안나 까레니나』를 읽고 가슴이 너무 먹먹했다.  난 그 가슴아픔이 안나의 비극적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극심한 혼란기를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또 살아갈 수 있는지를 작품 속에서 찾고 있지만 그 자신 또한 답을

얻지 못한 혼란의 여정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비단 톨스토이 뿐일까. 

표면적인 사회 제도는 고정되었으나(자본주의로) 인간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라는

고아의식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놓고 있다.  인간은 역사와 시대와 인종을 달리해도 삶을

살아가는, 아니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슬픈 존재이다.  또 죽을 때까지 답을 얻지 못한 채

여정 속에서 종말을 앞둔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와 닮아있다.  안나의 죽음 이후, 죽은자에

대한 언급이 지나치게 짧고 남은 분량이 레빈을 중심으로 넘어갔던 것처럼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질문을 우리에게 되돌리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류의 역사가 다한다고 해도 구해지지 않을 함수 속에 우리의 인생 하나하나가

해()가 되리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