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한강

한강 <흰>: 푸른빛(꿈)을 넘어서 흰(가능성)으로 나아가다.

묭롶 2018. 7. 29. 11:48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p39


  한강의 소설들은 나를 아프게 한다.  내가 애써 잊고 지내고 있던 것들과

외면하려 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소설 『희랍어시간』과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으며 나를 키운 팔할이 바람이 아니라 고통이었음을

그 고통의 한복판에 아직도 내가 서 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즐거움을 주는 문장도 많은데, 한강은

어쩌면 그렇게도 일관되게 인간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상실을 경험했거나 현재 상실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과거의 상실이 현재로 이어지며 

상처는 극복되지도 치유되지도 않는다.  작중인물들이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곳은 푸르름으로 상징되는 꿈을 통해서이다.


「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342-344 『바람이 분다, 가라』


「 수유리의 우리집 기억하니.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겁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 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고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73  『희랍어시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난 살 수가 없다' 와의 사이에서 자기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치뤄내고 있는 작중인물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푸른빛(꿈)에 있다면, 한강이 써 낸 '흰'은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p11


  『흰』의 문장을 읽으며 나는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푸른빛에 속하는 작품들이 개별적 인간 그 제각각의 고통에

집중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면 『흰』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실존의 고통이 아프지만 나의 고통을 넘어 누군가를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가능성의 영역을 

'흰'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한강의 이번 작품은 기존의 작품보다 새롭게 내디딘 한 발자욱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녀는 『소년이 온다』의 폴란드 출판을 기념하여 바르샤바로 떠났던 기간 동안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작품의 첫 부분은 태어난지 두 시간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언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언니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자신에겐 '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흰』은 출발한다.  작가의 생각에 비춰본다면 '흰'은 언니의 생이 그려졌어야 할 삶의 영역인데, 한강 자신이 그 '흰' 위에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었으니 이제 시간을 되돌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그 '흰'바탕 위에 언니의 몫이 존재함을

작가가 자각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흰'을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와 꿈과 현실이 모두 함께 공존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을 삶 속에서 숨쉬고 소통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면 우리 존재의 내부에는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건네주는 '흰'것을 받으며 나는 그 '흰'에 담긴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가 월세로

얻은 집의 녹이 슬고 삶의 각박함과 고통의 흔적이 새겨진 철문을 흰색 페인트로 덧칠하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애초의

색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룩지고 생채기가 난 내 삶이 그 철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게 한강이

건넨  '흰'것은 무게감없이 가볍고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처럼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한강은 쉽게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면도날로 뭉친 구슬 같은 시간을 앞으로도 걸어나갈 것이다.

그 시간 속에 피흘리며 적어내려간 문장이 또 우리를 인간에게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데려다줄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한강의 문장을 읽고 아픔을 느낀 건 삶을 비겁하게 살아가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깨어진 푸른 유리조각(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 발을 내딛을 자신도 없으면서, 그 길 위를 걸으며

푸르름에서 '흰'것으로 용기있게 나아가는 작가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고통이라는 실존 앞에 조금은 더 용기를

내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은 조금은 더 담담하게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