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묭롶 2010. 5. 8. 23:22

 

아버지가 빚만 몽땅 남기고 세상을 떠난 후부터 엄마는 우유배달을 해왔다.  4남매와 시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자전거도 못 탔던 엄마는 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타는 연습을 하며 몇 십번을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났다.  지금처럼 종이팩이 아닌 유리병에 우유가 담겨 배달되던 그 때, 눈길에 자전거가 넘어져서 배달할 우유가 몽땅 깨져버린 날, 우유와 눈에 흠뻑 젖은 엄마는 잠자는 우리가 깰까봐, 수도꼭지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그렇게 울고 나서도 눈이 오든, 태풍이 오든 엄마는 우유배달을 나갔다.  난 신이 있다면 꼭 묻고 싶었다.  도대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나에게 한 열개쯤 아니면 단 하나라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이 책의 저자인 한강의 문체는 살 속으로 음각되는 것 같은 고통과 몰입을 안겨 준다.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건 '죽은 물고기'라는 얘기처럼, 살아있는 연어가 실존을 증거하듯 강 상류로 거슬러오르기 위해 몸의 비늘이 떨어져나가고 살이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지켜보는 듯 한 참담함이 느껴진다.  읽어가며 한 글자 한 글자 글이 마음에 새겨지고 '피'가 베어나옴을 느끼면서도 단숨에 읽게 만든 이 책은 이파리가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로 혹한의 추위를 견디는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는 생존을 위해 끝없이 물줄기를 찾아 얼어붙은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겉보기에 그냥 나무 한 그루지만,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치르는 악전고투는 바위 속을 뚫고 뿌리를 내리게도 한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에서 작중인물 '삼촌'과 '인주'가 했던 그림 작업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과 닮아있다.  부양의 의무를 진 채, 단 한 순간도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정희'에게 '인주'는 '삼촌'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 줬던 '푸른 돌'을 전해주려 했다.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없어.  라고 그가 대답했을 때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짓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342-344

 

정희는 친구 인주의 죽음의 비밀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처절하게 한 번 더 부숴지고 난 후에야 인주가 자신에게 전달하려 했던 그림작업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p367

 

  내 인생도 어쩌면 인생이라는 한지위에 떨쳐진 한 컵 정도의 먹물인지도 모른다.  떨어짐과 동시에 한지의 결을 파고들어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말라버릴 조금의 먹물일지도.......

우연히 떨어졌음을 원망해보았자 소용이 없고, 왜 점성이 큰 먹물로 태어나 이리도 한지를 뚫고 나가는 과정이 힘든지를 되물어도 소용이 없다.  '정희'처럼 미리 자신의 불행한 삶을 예견한 채, 멈춘 채 나아가지 않는다면 '소멸'을 자처하게 될 뿐이다.   한지의 결을 따라 지난하게 흐르는 먹물의 궤적, 그 치열한 흐름이 증거하는 인간의 삶, 그 궤적과도 같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진 '인주, 정희, 삼촌 등'이 그려 낸 인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현실에서 찾아야 할 '푸른 돌'이 무엇인지를 고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