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허연>

<불온한 검은 피> 李箱과의 관련성을 확인해 보다.

묭롶 2017. 12. 17. 23:30

 

  허연 시인의 시집 『불온한 검은 피』에 수록된 시「내 사랑」에서 현실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살기' 같은 것이다.  삶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어서 그 삶을 살아가는 나는 '치욕의 입맛'을 느낀다. 

  전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푸른 것을 찾아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던 시인은 이제 깨뜨려진 푸른 현실을 맨발로 딛은채 피를 흘리고 있다.


   억눌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내출혈을 겪는 존재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마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출혈이 바로 '불온한 검은 피'다.  허연의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그러한 출혈의

기록이다. 


  또 다른 '출혈의 기록'의 사례를 김기림의 『그리운 그 이름, 이상』에 실린 다음 구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상은 한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상의 피가 임리淋漓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정신적으로 20세기를 앞서 살았던 청년 이상이 살았던 19세기의 현실과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정서적으로 다른 세계를 사는 허연......... 나는 이상과 허연의 공통점을 니체의 글을 통해 또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씌어진 모든 것 가운데서,

나는 다만 피로 씌어진 것만을 사랑한다.

피를 가지고 써라.  그러면 그대는 알게 되리라.

피가 정신이라는 것을.

사람의 피를 이해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中


  이제 살펴보자.  19세기를 살았던 '니체'가 부르짖는 '피'는 문학의 진정성을 의미한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니체가 찾을 수 있는 답은 어디에 있을까?  초인으로 명명되는 그가 찾는 이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언어는 언제나 이산화탄소에 물들지 않은 선홍의 핏빛을 띠어야 할 것이다.

  니체의 사후 이십년 뒤에 태어난 이상의 경우, 그의 물리적인 신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현실에서의

각혈은 그의 작품 속에서 죽음에 대한 욕망으로 표출됨으로써, 죽음을 희망하기 위해 삶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방어기제로서의 역할을 드러낸다. 


  니체가 문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진정성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한 '피'는 이상에 이르러 '피(죽음)'의

출혈을 드러냄으로써 역으로 삶을 모색하는 어쩌면 희망의 붉은 빛을 띤 것이지만, 21세기를 사는

허연에 이르러  내출혈에 이름으로써 죽은 피가 되어버린 것이다.


  허연의 시를 읽고 고민하게 된다.  그럼 죽은 피를 다시 선홍빛으로 되돌릴 산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시인이 부서진 푸른 조각(현실)을 맨발로 딛고 선 채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나쁜 소년이 서 있다』)이 절망(『불온한 검은 피』)에

이르렀을때, 어쩌면 그 밑바닥이 주는 자조와 비애의 감정이 삶으로 한 발을 내디딜 힘을 주는 건 아닐까.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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