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묭롶 2009. 7. 1. 13:23

 소설이 실재에 근거한 허구라면 이에 비해 시는 시인이 경험한 기억의 산물이다.  하지만 시인의 경험들이 모두 ‘시’로 발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들을 ‘시’로 건져 올리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으로 보여 진다.  실제로 많은 시인들이 시집을 발표한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음 시집을 출간하거나, 아니면 첫 시집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시를 발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은 마치 심지를 태우는 동안 찬란한 빛을 뿌리는 촛불처럼 그 빛이 타는 동안 어둠을 잠시 동안 밝혔다가 흘러내린 촛농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후 시인은 다시 불을 밝히기 위해 심지를 찾게 되고, 그 심지를 찾는 여정이 바로 다음 시집이 나오기까지 시인이 겪어낸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심’의 원천인 ‘심지’를 찾기 위한 여정은 결코 쉽지가 않다.  삶을 통해 ‘심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시인들이 다음 작품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고심하고 방황하진 않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들의 시 창작에 오랫동안의 공백기가 발생하는 이유와, 경험이 시로 발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를 『신체와 문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시의 언어는 마음과 몸과 풍경의 경계에서 그 만남과 엇갈림이 생성시키는 틈새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적 발화는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사고나 체험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고나 체험을 완수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을 사물에 부딪쳐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언어로 꿈꾸고 추억하며 욕망한다.  」p109~110

「~우리는 신체적 주체가 지닌 다른 속성들과도 만난다.  그것은 세계-내-존재로서의 ‘맥락성’과 ‘시간성’이다.  ‘맥락성’이란 신체적 주체가 자신을 형성하는 배경, 즉 사회적․역사적 현실과 상호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신체적 지각은 항상 체현된 지각이므로 구체적인 맥락 혹은 상황 안에서만 존재한다.  신체는 의식이 살로 변한 육화된 의식이다.  더 나아가 신체는 세계-내-존재의 운반이다.  ~이 관계의 원리에 의해 신체적 주체는 세계와 교류하고 타인과 대화하며 상호 주체성을 형성한다.  이 맥락성 중 특히 ‘시간성’은 신체가 과거․현재․미래와 만나는 자리가 됨을 의미한다.  즉자가 아닌 투사projection로서의 신체는 시간적으로 구조화된다.  신체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들이며 이로써 이미 자신이 기대하는 미래의 형식을 부여해놓는다.  신체는 과거의 흔적이 침전된 자리이며 동시에 미래적 욕망이 움트고 있는 자리이다.  」p130~131


  위 인용문처럼 시집과 시집 사이에는 시간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이를 자신의 뼈와 살, 정신으로 육화해낸 ‘시인’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속을 흐르는 시간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실제를 그 자체로 인식하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틈새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여 지는 실제는 우리가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동공을 통과한 영상을 머릿속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순간 현재라고 보았던 실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간 과거의 시간의 잔상을 현재의 모습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눈으로 보여 지는 현실의 틈새를 포착하여 그 왜곡된 실제를 주시하는 존재이다.  일반인들이 거대한 시간의 물결 속을 떠내려갈 때, 시인은 그 강물 곁에 쪼그리고 앉아 오랜 시간 물결을 지켜본다.  어느 한 순간 시인이 포착했던 강물(시간)의 형상은 이미 흘러가버린 강물(시간)이기에, 시인이 그 이미지를 ‘시’로 발화하기 위해서는 흐려지고 불투명한 기억의 잔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95년 『불온한 검은 피』를 발표 후 십 삼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 2008년 『나쁜 소년이 서 있다』로 돌아온 허 연의 작품을 통해 첫 시집 이후 시인이 겪은 시간들의 흔적이 어떻게 시로 재구성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1995년 ‘불온한 검은 피’를 발표했던 시절 시인에게 시는 세속(남루한:비굴한)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산물이었다.  그 시절 시를 창작하는 동안에는 배고픔은 물론이고 시인을 괴롭히는 세상사도 모두 잊고, 시 세계에만 몰입해야 한다는 믿음이 그를 지배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자신이 감각하는 실질세계를 배제한 채, 시인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를 쓰는 과정은 현실과의 괴리감을 심화시켰고, 그 결과 ‘시는 부서져 반짝였’다.  시인의 머릿속(이성)에서 언어는 도처에서 반짝이고 있었으나 그는 이를 실체적인 ‘시’로 건져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밤하늘의 고결한 별처럼 반짝이는 이미지들을 시로 발화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좌절되었고 그는 그런 자신에 환멸을 느껴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시를 떠나 긴 시간 세속에 침잠해 있으면서도 시간은 시인의 몸에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은 지층 속에 묻힌 뼈들처럼 저 마다의 기억(사연)들로 반짝였다.  그렇게 오래도록 ‘세월이 흐르는 걸 잊’고 현재만을 살던 시인은 ‘파편 같은 삶의 유리조각들’로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자리 잡은 과거를 인식하고 이를 더는 묻어둘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과거로부터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무섭게 반짝이는’ 과거와 담담하게(당당하게) 조우한다.  겪어왔던 시간들을 자신의 몸속에 묻어두고 긴 시간 삭혀낸 결과 시인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나는 나를 만들었다’) 있었고, 다시 ‘시’를 쓸 수 있게(‘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되었다.  과거 ‘푸른색’의 ‘시’를 동경했던 소년은 이제 ‘푸른색의 기억(과거)’을 담고 있는 자신의 몸을 통해 다시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미래(‘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까지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2008년에 발표된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시집은 바로 과거의 ‘소년’이 현재의 ‘나쁜 소년’을 만나는 지점의 발화물이다. 

 「생태보고서」와 「슬픈 빙하시대」에서 시인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들(과거)을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사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현재는 ‘금세 불어온 바람’으로 발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절대성의 ‘이데올로기’가 부재한(「생태 보고서2」)공간이다.  과거 이상적인(이성적인) 시세계를 동경하던 눈으로 현재를 인식했던 시인에게 그 시절, 삶은 ‘저승과 진배없는 소금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삶 속에서 ‘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슬픈 빙하시대 4」)하고, ‘늘 죽어야 하는 이유만큼 살아야 하는 이유도 있었는데 시에는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다(「생태 보고서 1」)는 구절에서 자신의 이상(이상적이 시세계)과 실제(과거의 시인의 모습)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자괴감과 환멸이 시를 쓸 수 없었던 이유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시를 떠나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아가던 시인은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며 사람들 속에서 자신 또한 ‘때 묻은 나이’임을 고백하며 ‘속세의 마음으로 시 쓰는 친구들과 디카 앞에 선 나는 어차피 비틀댈 것은 이미 비틀대기로 한 것임을 문득 깨닫는다.  하지만 다시 시를 쓰기 위해서 이러한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강가에서 뼈들의 과거를 읽’기 위해서, ‘한때는 사랑이나 환멸이었을’ 과거의 ‘그 뼈들이 이렇게 또 반짝이며 부서’지며(「슬픈 빙하시대 2」),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검은 지층의 노래」)를 건져 올리려면 시인의 몸속에서 굳혀진 과거의 시간들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굳어진 과거의 시간을 시인은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에서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형의 상스러움’이라고 말한다.  또한「지층의 황혼」에서 ‘떠나온 길들이 아득했던 날 만난 붉은 지층.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라는 부분에는 시인이 자신이 겪은 시간의 흔적들을 자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이 파 놓은 미세한 홈이 있지 않다면 언어는 흘러내릴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와 현재는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을 중간지점으로 하여 미래에까지 이어져 있다.  이러한 자각을 혀 연은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고 말한다.  또한 「커피를 쏟다」에서 ‘세월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뿐 지나가 버린 일입니다.’라며 너와 내가 모두 세월이라는 강물 속에 떠밀려 흘러갈 뿐이라 말한다.  그 「수천만 년 전」부터 흘러내려온 강물 속의 ‘망연자실’을 공유한 사람의 인간사를 바라보는 시인은 ‘빛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나를 지나쳤을 뿐’이라며,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런 자신(평범한)까지도 ‘용서하’(「빛이 나를 지나가다」)는 것이다.  ‘도미’에서 시인은 ‘헤엄치기를 잊어버린 도미’가 ‘죽었나 싶었는데, 살짝살짝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모습을 ‘용서한 자의 자태’라고 표현한다.  비록 비루한 삶을 살지만 ‘눈이 맑’은 도미를 보며 자신의 가슴 속에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아있는 ‘시심’을 확인하고 있다.    이제「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시인이 다가설 수 없어서 외면했던 ‘계급이 높은 여자’를,「산을 넘는 여자」에서 ‘죽지 않고 산을 넘는 여자를 보기 위해’ 돌아왔다는 고백에서 그가 ‘시’를 다시 쓰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울 줄도 알고 내 목을 조일 줄도, 나를 용서할 줄도 아는 그 여자.  너무나 자폐적이고 미숙한 그 여자~아무리 봐도 통속은 아닌 그 여자, 즉 ’시‘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시인은 ’서른 개가 넘는‘ 시간(세속)을 ’넘어‘온 것이다.  「휴면기」에서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며‘ 자신은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는 그의 고백에서 ’시‘가 오랜 시간을 몸으로 겪은 시인의 기억의 지층에서 형성됨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통해 시의 발화점이 높은 이상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우리와 함께 발 딛은 바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이 실제를 근거로 한 허구라면, 시는 시인이 실제 삶을 살아가며 쌓아 온 기억의 지층에서 파 올린 형상의 결정체이기에 은유와 환유 등의 여러 방식으로 그 모양을 바꿀지언정 그 순도는 100%인 FACT(사실)의 결정체이다.  그 시간의 결정체는 소설과는 다르게 독서의 과정 속에서 독자의 시간들과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의 결과물(상상력 및, 감동)을 낳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시’가 갖는 현재의 위치가 아닐까?  단지 시간이라는 강물을 떠내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시’가 주는 집약된 결정체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아직까지 유일하게 자본에 배타적인 ‘시’의 위치일 것이다.  아마도 허 연이 오랫동안 떠나 있던 시세계로 다시 돌아온 까닭이 그 지점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