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카를로스 푸엔테스>

<의지와 운명> 잘린 머리가 들려주는 삶의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

묭롶 2017. 4. 2. 09:57


  호메로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다.

신탁을 들은 그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버렸지만 그는 테베로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아들과의

싸움 끝에 목숨을 잃게 된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에 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의지와 운명』을 오이디푸스 신화라는 알레고리에 놓고 살펴볼때,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극복하려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이 책의 서사는 그 주체성이 한낱 착각에 불과

하다는 반전을 통해 오이디푸스 신화의 비극성을 지금의 시대로 계승한다. 


  인간의 삶을 운명과의 장기 경기와 비교해볼때 그 장기판은 이미 죽음이라는 끝으로 확정적 결론이

지어진 경기이다.  더불어 운명의 장기판 위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수를 두고 있다고 믿지만

결국 자신이라는 장기말을 움직이는 운명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 강제로 무릎 꿇리는 듯한 굴욕감을

느낀다. 


「예리고가 옳았다.  우리는 항상 복잡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수많은 길이 갈려 나가는 원형의 광장.  길들은 모두 다른 광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그 광장에서 또 수많은 길이 갈려 나간다.

~끝없는 광장들, 끝었는 인생을 위한 끝없는 길들,

~우리는 집단망각의 일부이다.  번호가 없는 전화번호부,

백지만 들어 있는 백과사전, 아무리 만져도 지문이 남지 않는 그런...... 」2권 p148


  살아가는 과정 중 운명이라는 불가항력 앞에 우리가 펼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빈약한다.  자유의지를

펼치기보다는 차선을 선택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을 것이다.  그럼 과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이것이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악랄한 죄가 아니란 말인가?

그토록 겸손했던 루시퍼의 반항이 가장 중한 죄가 아니란 말인가?

바로 하느님을 능가하고 싶어 했던 그 죄 말이다.

  바루흐 스피노자는 어깨를 으쓱한다.  거미가 파리를 삼킨다.

죽음은 잘못된 만남일 뿐이다.」1권 p83


  이 책에 등장하는 다음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1. 안티구아 콘셉시온

      정치. 경제적 혼란과 국가적 빈곤에 시달리는 멕시코에서 탐욕적으로 자신의 부를 늘려나가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막스 몬로이(마흔살)를 열 네살인 시빌라 사르미엔토와 결혼시킨 후 필요가 없어진 며느리

시빌라를 정신병원에 가둔 인물.  결국 콘셉시온 살아 생전 복종해야했던 아들 몬로이에 의해 죽자마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당함.


  2. 막스 몬로이

「수단의 사나이 막스는 수단에도 목적과 같은 가치를 부여했고,

낮이 밤에서 태어나듯 목적도 수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지. 

~어떤 목적의 승리란 있을 수 없어. 

어떤 수단의 가능성만 존재할 뿐이지. 

~막스 몬로이가 성취하는 모든 것은 다음 수단에 닿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끝이 없는거야.」1권 p363

       어머니 콘셉시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은 부를 상속받아 더 많은 부를 확장함으로써

국가권력과 동등한 부의 권력을 지닌 인물.  어머니의 강력한 속박에 대한 복수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된

시빌라에게서 아들들(예리고와 여호수와)을 얻어 부모없는 상태로 양육하여 자유의지를 지닌 인물로 키우고자 함. 


  3. 미겔 아파레시도

「나는 그날 공포에 떠는 미겔 아파레시도의 두 눈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서 일순간 내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두 사람이, 자유로운 나와 감옥에 갇힌 그가 똑같은 딜레마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권 p372

       열 네살에 결혼한 시빌라와 마흔살의 몬로이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할머니 콘셉시온에 의해

길거리에 버려져 범죄조직에서 생활하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친부를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한 후 살해의지를 지닌 자신을 막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둔 인물.


  4. 예리고

「"좀 더 끈덕지게 굴어, 여호수와.  지금까지 우린 함께 전진해 왔잖아.

나보다 뒤처지면 안 돼."」1권 p56

  몬로이의 둘째 아들.  성도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가 학창시절 여호수와를 만나 우정을

나눴고 보호자인 변호사 상히네스의 지시를 거부하며 자신이 삶의 주체라고 믿었지만 아순타 호르단의

이간책에 넘어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


  5. 여호수와 나달

「내 형제와 나를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막스 몬로이의 의지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는 짓이었다.  우리는 막스 몬로이의

죄책감에 이용당했던 것이다..........」2권 p205

  몬로이의 셋째 아들.  예리고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보육 환경 속에서 자라나 주어진 학습환경과

지시 속에서 순응하며 살다 예리고를 만나 그와의 친분을 통해 자유의지를 각성한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몬로이의 부를 독차지하려는 아순타 호르단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인물.


  6. 아순타 호르단

「욕망은 우리에게 욕망의 대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을 원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며,

그것을 손에 넣느 순간 오로지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지배하기를,

그것들의 자유를 빼앗아 우리 자신의 욕망의 법칙에 굴복시키기를 원한다. 」2권 p17

        멕시코 북부 사막의 교양없는 중산층의 삶을 살던 평범하지만 현재에 가장 불만이 많았던 시골 아낙.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막스 몬로이에 의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고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방법을 획책하며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자유의지가 가장 강했던 인물.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있다면 그건 크게 순응(미겔 아파레시도-운명을 피해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둠) 아니면 수용(여호수와-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그 속에서 방법을 모색),

극복(콘셉시온, 몬로이, 아순타, 예리고)으로 나눌 수 있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이 세 가지 선택을

한 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콘셉시온과 몬로이, 아순타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갈증을 운명으로 타고난 인물이기에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발현되는

자유의지는 결국 자신을 속박하는 운명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게 된다. 


「막스가 내게 말했다.  "이게 뭐지,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지?"

나는 감히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누가 운명을 막았습니까?"

"네가 내 운명을?  내가 네 운명을" 그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원하지 않았던 보호의 목소리로 말했다.」2권 p244


  자신을 옥죄는 운명과도 같은 어머니 콘셉시온의 눈을 피해 자식(예리고, 여호수와)을 주어진 환경

(출생, 경제적, 사회적 환경)이라는 한계에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물로 키우고자 했던 몬로이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욕망을 지닌 아순타 호르단에 의해 좌절된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어머니에 의해 가족을 가질 수 없었던 몬로이는 어머니를 닮은 자신의 최측근에 의해 아들들을 잃게 된다.

   운명을 상대로 한 백전백패가 예상되는 장기판에서 그는 시대를 앞서 예견했다고 믿었던 어머니

콘셉시온처럼 자신의 앞에 놓인 수를 몇십배 내다보았다고 믿으며 자식들(예리고와 여호수와)의 삶을

장기말처럼 배치했다.  하지만 운명이 배치한 퀸(아순타)에 의해 아들들을 잃고 킹(몬로이)만 남은 상태에서

이제 몬로이는 죽음이라는 운명의 마지막 수를 기다리는 처지에 놓인다.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여러가지 환경과 인종, 시대를 뛰어넘어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이라는 공동 운명체로 우리를 묶는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의지가 무엇이며 왜, 어떻게 뭘 해야하는지를.  작중 멕시코의 국가적 빈곤과 정치적 혼란이 국민 대다수를

범죄로 내모는 것이 숙명이며, 그 범죄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일정부분에 대한 인공감소(살인)를

허용하는 것이 또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국민 대다수를 외면한 채

자신들 만을 위한 담합을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 과정을 살아가야 하는 대다수가 취할 수 있는 자유의지

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멕시코 시티의 '가난한 민중'에게는 가난과 범죄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다고 예리고는 말했다.  예리고는 그중 무얼 선택할 것인가?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범죄를 선택할 것이다.

감상에 젖어 하는 말 중에서 어떤 게 가장 혐오스러운지 알아?

~가난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라는 거야. 

천만의 말씀.  가난은 잔인한 거야.

가난한 놈들은 돼먹지 못한 놈들이지. 

운명에 굴복했기 때문에

돼먹지 못한 놈들인 거야. 

놈들은 가난에 대항해 범죄자가 되어야 겨우 구원받을 수 있어.

범죄는 가난의 미덕이지.」1권 p133


  작중 예리고의 말은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환경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몇장 되지 않는다.  국가적 빈곤으로 인한 대다수 국민의 상실감을 축제나 다른

화제(내란, 전쟁 등)로 시야를 돌림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작중인물 카레라 대통령처럼 다수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작중 카레라:정치, 몬로이:富 등)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기보다 자신의

주어진 책무에 충실하다면 그 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가난에 대항해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리고의 말은 그런 선택의 길로 내몰리는 대중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상층부에 대한 반어법적 표출일지도 모른다.


  그럼 다시 묻게 된다.  운명 앞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며칠전 영화 <공각기동대>를 봤다.  극중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는 인공신체에 인간의 영혼을 지닌 기계

인간이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는다.  사이버범죄 제보를 받고 출동하는 길에서

팀원들이 합류하기 전 작전 침투를 저지하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홀홀단신 범죄현장에 출동한 그녀는

부상을 입는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손상받은 자신의 신체를 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정체성의 혼란이

가득 담겨 있다.  그녀의 혼란 속에서 인간? 이 어떤 존재 어떠한 상태를 인간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 의문은 『의지와 운명』을 통해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  소설과 영화라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질문이다.


  어떻게 살고 왜 사는게 인간인가?  나는 어차피 끝이 죽음이라는 결정된 운명에 놓인게 인간이라면

그 살아가는 과정의 매 순간순간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의자와 운명』의 잘려진 머리 신세가 된

여호수와가 하고 싶었던 얘기도 바로  '신이 눈에 보이지 않듯 보이지 않는 운명에 굴복하기 보다는

살아있는 현재 행동하는 나를 자각'하는 삶을 살라였을 것이다.  바로 지금 당장 운명이 내 뒷통수를

후려갈길수도 있겠지만 굴복할 생각이 없는 살아있는 내가 바로 지금의 나이다.  난 그걸 자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