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성숙이라는 가면을 벗은 민낯의 욕망들이 추는 군무!

묭롶 2016. 12. 7. 22:15

 

  우리는 흔히 '포르노그라피아'라는 단어에서 벌거벗은 육체의 유희를 떠올린다.  이미 전작

『페르디두르케』를 통해 사회가 부여한 낯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비틀어 꼬집었던

작가답게 이 책 또한 우리의 상상과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이 말하는 '포르노'는 육체의 벌거벗음 대신 성숙이라는 가면 뒤에 가려진 추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욕망의 민낯을 드러낸다.  『포르노그라피아』는 감춰진 인간 내면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인식하며 느끼는 상대에 대한 혐오와 또 이를 통해 자신의 추함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 자기혐오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성숙한 두 남성(비톨트와 프레데릭)은 성숙이라는 가면에 갇힌 채, 허락되지

않고 실행할 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한 불평 속에 삶을 근근이 유지한다. 그런 그들 앞에

가능성의 존재로서 미성숙(실패가 용납되고, 뭐든지 가볍게 실행할 수 있는)인 카롤과

헤니아가 나타나게 되고  비톨트와 프레데릭은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충족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식당에서 히폴리트와 마주쳤다.  그를 보다 또다시 구토증이 일었다.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속에서 치미는 내 반감에 잔털 한 올이,

우리의 손등에 난, 그러니까 시에미안의 손등, 히폴리트의 손등,

내 손등에 무수히 난 그 잔털 한 올이더해졌어도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성인 남자의 모습도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p278

 

  이미 성숙의 단계를 넘어 농익어 곧 썩어버릴 과일과 같은 자신들과 달리 미성숙 즉 이제 꽃을 피워서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존재인 카롤과 헤니아에게 그들은 매혹당한다.  그들은 원예에서 화초끼리 접을 붙여 기존의 화초와

남다른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미성숙의 삶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연출함으로써 그 가능성이 맺어낼 결과물을 얻어내고자

한다. 

 

「성숙한 인간은 다른 성숙한 인간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에 대한 강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숙한 인간은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이 타인의 마음에 드는지,

자신이 호감을 주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할 뿐이다.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가 여부에 따라

어떤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이 추한지가 결정된다. 

그 자신,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해서! 

성숙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그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 없다. 」p281~282

 

  그런 그들의 욕망 앞에 그 어떤 것도 방해물이 될 수 없다.  배고픈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비난받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성숙이라는 가면을 쓴 채 미성숙에게 자신들이 연출하는 실험극의 역할만을 부여할 뿐 전지적

시점의 작가처럼 뒷짐을 진 채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린다.

 

  『포르노그라피아』에서 미성숙(카롤과 헤니아)에 매혹당하는 성숙(비톨트와 프레데릭)의 모습과 성숙들끼리의

자기혐오는 토마스 만의 단편「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인용부분과 닮아 있다.

 

「~그런데 아셴바하가 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본 순간

그 사람이 젊은이가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늙은이였다.

~뺨에 나타난 엷은 홍조는 화장을 한 것이고

~바짝 치켜세운 콧수염과 턱에 있는 파리수염은 염색한 것이었고,

웃을 때 보이는 누르스름하고 결이 고른 치아는 싸구려 의치였다. 

~오싹한 기분으로 아셴바하는 그 남자를,

그리고 친구들고 함께 노는 그 남자의 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사람이 늙은이인 데다가 멋을 잔뜩 낸, 젊은이들이나 입는 현란한 옷을 부당하게 

입고, 부당하게 자기들의 동료인 척하고 있다는 걸 알지도 눈치채지도 못하는 것일까?』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p438~439

 

->「그 아이의 걸음걸이는 상체의 자태에서뿐만 아니라,

하얀 신발을 신은 발을 아주 우아하게 내딛는 무릎 동작에

있어서도 너무나 가볍고 부드러웠다. 

 자부심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어린아이다운 수줍음을 보여 더욱 귀여웠다. 

~그런데 그 아이의 옆모습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아셴바하는 다시금 경탄했다. 

그 아이가 지닌 신적인 아름다움에 다시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p456~457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그토록 많은 뿌듯한 감동을 선사한 그 소년과

경쾌하고 명랑한 인사를 나누고 싶은 소망, 즉 소년에게 말을 걸어 소년의 대답과 눈길을 즐기고

싶은 가벼운 생각이 언뜻 떠오르더니 참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p484~485

 

 「이제 내게 허용된 삶이란 두들겨 맞은 개,

비루먹은 개 꼴로 살아가는 삶 그 이상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나이에, 성적 타락의 대가로라도 새삼 자신을 꽃피울 기회,

젊음으로 돌아갈 기회가 온다면, 추함이 여전히 아름다움에 의해

이용되고 흡수될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렇다면......

이건 모든 장애물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렇지, 열광, 아니, 그보다는 광기, 숨이 막혀오는......」p188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매혹'의 과정과 '매혹'이 무엇인지를 대비와 묘사를 통해 정확히 드러내보인다.  젊음을 가장한

늙음에 대해 갖는 혐오는 진짜 젊음(소년)을 더 매혹적으로 빛나게 하는 어둠이다.  혐오의 어둠 속에서 발견한 소년에게

빠져든 아셴바하는 이제 소년에 몰입하는 자신에게서 자기혐오를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거부할 수 없음을 자각한다.

 

 아셴바하가 느끼는 혐오와 매혹, 몰입의 과정은 『포르노그라피아』에서 비톨트와 프레데릭이 서로를 혐오하면서도

서로가 같은 욕망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후 카롤과 헤니아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닮은꼴이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아셴바하는 매혹의 대상인 소년에게 접근하지 못한 채 죽었다는 점이고, 이 소설의 작중인물인

성숙한 두 남성은 자신들의 욕망을 미성숙(젊음)에 투영시킴으로써 아셴바하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일단 칼을 손에 잡자

그녀 자신도 억제하지 못하는 난폭한 충동에 휩싸여서는

소년에게 달려들어 죽이려고 했고,

두 사람은 뒤엉킨 채 바닥에 굴렀고,

그녀가 소년을 깨물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p147~148

->

「그런 행동이란 어린 사람을 상대로 할 때가 훨씬 쉬운 법이죠.....

~그럼요.~어른에게 그러기보다는 어린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게 더 쉽고,~"내 말은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

」p150

 

  이 책은 사회화라는 성숙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가면 뒤에 들끓는 욕망의 광기를 숨기고 있는 인간들이 가능한 대상을

발견하게 되면 숨겨둔 광기를 발산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이 작품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공격으로

발산할 수 없는 저마다의 광기를 숨긴 채 숨죽여 살아가던 사람들의 광기가 어떤식으로 표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말미 같이 공모한 두 명의 성숙(비톨트와 프레데릭)과 두 명의 미성숙(카롤과 헤니아)이 마주보고 웃는 대목은

스릴러 물의 반전처럼 소름이 끼쳤다.

언제든 대상과 기회만 있으면 타인에게 전지적 지위(신과 같은)를 갖고자 하는 인간의 숨겨진 광기를 벌거벗겨 보여준

『포르노그라피아』는 인간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