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비톨트 곰브로비치>

<페르디두르케>를 읽고 李箱의 시를 다르게 읽다.

묭롶 2016. 11. 13. 21:41

 

  솔직히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는 난해한 책이다.  하지만

또 재밌는 책이다.  다른 소설가들이 다 만들어진 결과물로서의 소설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반면 곰브로비치는 흩어져있는 재료로서의 언어

(블럭 조각 같은)를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이 언어라는 재료를 통해

독자가 무엇을 만들어 결과물을 갖든지 말든지 작가인 곰브로비치는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그렇다.  어렵고 난해한 책을 읽고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를 늘어놓는 건

만취로 기억을 잃은 채 지껄이는 주정만도 못하다. 그런데 난 『곰브로비치』를

읽으며 1937년에 출간된 이 작품과 1930년대 발표된 李箱의 시편과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작품을 통해 전혀 공통점(인종, 문명, 국가, 언어적)을 지니지 못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열쇠를 얻는 경험은 내 독서의 특징적 즐거움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중학교 시절 읽게 된 李箱의 『날개』이후 李箱은 내게 허락된 시간의 끝까지 함께 할 화두가 되었다.

난해함으로 치자면 둘 중 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 소설 속 화자인 유죠가 말하는 '낯짝'과

李箱이 말하는 '포즈'는 닮은꼴이다. 

 

「~나는 내 안에서 두려움을 느꼈고, 또 두려움은 외부에서 나를 위협했다. 

가장 심각했던 건, 말하자면 내 온몸의 입자들에 연결된 조롱과 야유의 느낌이,

그러니까 내 육체와 정신의 모든 조각들이 나를

은밀하게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는 거다.」p8

 

「~모든 발달이 완성되었고, 과거의 나를 죽여 없애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어른이 된 내가 절망에 빠진 소년을 죽여야 하는 때. 

허물을 벗고 나비처럼 날아올라야 했다. 

~이젠 분명하고 다듬어진 형식을 취해야 했고,

머리를 빗고 매무새를 정돈해야 했다. 

성인들의 사회생활에 발을

내딛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p11

 

  작중 화자인 유죠는 성숙을 가장한 채 소설가로 살아가는 서른살의 남자다.  그는 자신의 미성숙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고 그 자각은 그를 끝없이 작아지게 만든다.  문제는 현재의 그를 이루는 '과거의 나'다.  화자는

현재의 미성숙의 원인을 '과거의 나'들에서 찾으며 그들과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낯짝을 획득함으로써 성숙으로의

비상을 꿈꾼다. 

 

『페르디두르케 』의 작중인물 유죠의 자기인식은 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 시제일호(詩第一號)의 인식과

유사점을 갖는다. 

 

烏瞰圖

 

詩第一號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 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 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 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 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페르디두르케』에서 작중인물 유죠는 '과거의 나(미성숙)'들과의 단절(살해)을 통해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는 애초부터 실패가 예견된 방법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들의 결합체이기에

그러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중 화자는 그 시도의 불가능성을 통해 현재 자신의 미성숙을

합리화하고자 한다.  유죠의 시도를  李箱의 시 오감도 시제일호에 대입해보면 오른쪽과 같은 도식을 만들 수

있겠다.  여기에서 상(箱)은 과거의 李(실패한 시도) 제 1부터 제 13까지를 담은 상자이다.  그 실패의 기억

(무서운 과거의 나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나'가 느끼는 자기인식(무서워 하는)이 바로 오감도 시제일호다.

 

  주어진 수명과 나 자신이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과거의 나(무서운 아해)들은 자학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무서운 아해들끼리와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사이에는 서로 연결고리가 없기에 서로가 역할을

바꾼다해도 상관이 없다. 결국 무서워하는 현재의 나는 현재를 인식함으로써 또 하나의 무서운 아해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이 영원한 실패의 사이클 속에 탈출은 없다는 절망감이 이 시를 지배하는 정서이다.

 

  또 다른 시(詩) 제십오호(第十五號)를 살펴보자.  이 시에서 거울을 통해 느끼는 자아인식은 빈방에서

타자화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며 혐오감을 느끼는 『페르디두르케』의 유죠의 인식과

닮은꼴이다.

 

烏瞰圖

 

詩第十五號

 

 

나는거울업는室內에잇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지금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잇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는어떠케하랴는陰謀를하는中일가.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잣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얏고義足을담은 軍用長靴가내꿈의 白紙를더럽혀노앗다. 

나는거울잇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골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傳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여잇듯키그도나때문에囹圄되여떨고잇다. 

내가缺席한나의꿈. 내僞造가등장하지안는내거울. 無能이라도조흔나의孤獨의渴望者다.

나는드듸여거울속의나에게自殺을權誘하기로決心하얏다.

나는그에게視野도업는들窓을가르치엇다. 그들窓은자살만을위한들窓이다.

그러나내가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自殺할수업슴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不死鳥에갓갑다. 

내왼편가슴心臟의위치를防彈金屬으로掩蔽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견우어拳銃을發射하얏다.

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貫通하얏으나 그의心臟은바른편에잇다. 

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업즐러젓다. 내가遲刻한내꿈에서나는極刑을바닷다. 내꿈을支配하는자는내가아니다.

握手할수조차어는두사람을封鎖한巨大한罪가잇다.

 

=>

『페르디두르케』 p25

「~마치 다른 사람을 쳐다보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이기도 하면서 내 얼굴이 아닌 그 얼굴을

보았다.  ~그의 모습은 조금 흐린 녹색이었다.  내 코다......내 입술이다...... 내 귀, 내 집이다. 

~두 가지 힘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와 증상들, 바깥의 힘과 안의 힘이라는 두 힘이

싸우고 있는 얼굴, 그것은 바로 나였다.  아니, 내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그것이었다.」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하는 인물(李箱)과 과거의 나를 죽여없애려는 유죠는 같은 방법을 꿈꾼다.

그들은 거울에 비친 나(타인의 눈에 인식되는 자신)와 그런 나를 인식하는 나 사이에 화해가 불가능함을

인식한다.    '나'지만 '내'가 아니고 악수를 하려고 하지만 영원히 악수할 수 없는 대상을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한 시도가 李箱의 작품이며 『페르디두르케』의 유죠가 낯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모험이다.

곰브로비치는 말한다. 

 

이제 끝이다. 트랄랄라.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한마디하자.  제기랄!」p438

 

  끝이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  어찌보면 조롱같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다.  누구도 자기자신의

생을 정의내릴수도 죽음 앞에 성공을 자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사람은 동 시대를 살며 다른

공간에서 다른 언어로 문학을 했지만 문학이 무언가를 설명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기존의 방법론으로 길어올릴 수 없는 새로운 시도(물론 두 작가 모두 실패를 공언하는

바였지만)는 그 새로움으로 인해 앞으로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갖는다. 능력이 모자라서 이 작품을

통해 李箱의 시 오감도 겨우 두편을 거칠게 살펴봤지만 이 소설은 앞으로 내가 읽을 다른 작품에도

열쇠가 되어줄거란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고전이 갖는 힘이다.

 

ps.만약에 이 둘이 동 시대에 만나서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면 서로에게 문학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펼쳤을지가 궁금하다.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