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묭롶 2012. 10. 30. 13:45

 

 『지상의 양식은 현재에 내가 느끼고 보고 만지고 먹고 마시며 냄새맡고 듣는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는 신성에 대한 예찬으로 디오니소스 신이 재배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뮤즈신이 강림하여 쓴 시를 보는 것과 같은 도취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여름!  녹아내리는 황금, 흐드러짐, 더욱

많아진 빛의 찬란함, 사랑의 엄청난 범람! 

누가 꿀을 맛보려는가?  밀랍집들이

녹아버렸다.」p174

 

「우리에게 생(生)은

야성적인 것, 돌연한 맛

그리고 나는 여기서 행복이

죽음 위에 피는 꽃과 같음을 사랑한다.」p184

 

 

  이 작품에서 나는 '햇빛'과 '갈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햇빛은 '갈증(욕망)'의  원인이자 자아를 도취시키는 이중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드는 인간이 갖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욕망을 가시지 않는 갈증으로 표현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적으로 본인이 무엇에 목마른지를(욕망) 모르는 채 계속해서 갈증을 느끼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감각들엔 제각기 저마다의 욕망들이 따로 있었어. 

나는 나 자신의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데 하인들과 하녀들이 내 식탁에

앉아 있는 거야.  내가 끼여 앉을 조그만 자리 하나 남아있지않았지. 

주빈석은 '갈증'이 차지하고 있더군.  다른 갈증들이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다투었어.  ~그러나 그들이 나와 맞설 때는 모두가 다 한패가

되는 거야.  ~그래 나는 다시나와서 그들에게 포도송이를 따 주러 가야만 했지.」p110

 

   햇빛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내리쪼이지만 그 볕을 맞으며 누군가는 갈증이 심화됨을 느끼고 다른 누군가는 갈증을 잊고 도취상태에 이른다지드는 현재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급급하기보다는 내리쪼이는 태양빛 아래 모든 사물이 그림자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정오와 같이 자기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그 욕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받아들이기를 권고한다.  그와 같은 과정은 내가 욕망의 주체라는 사실도, 나의 욕망이 추구하는 바도, 내 욕망의 실체도 중요하지 않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귀결을 의미한다.

  최근 종영된 <아랑사또전>에는 인간의 몸에 빙의되어 존재를 유지해 온 무연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애초에 무연이 인간의 몸에 빙의되었을 당시에는 사랑하는 존재(무영)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겠다는 욕망이 주도적이었지만, 오랜 세월을 번갈아가며 인간의 몸에 빙의된 결과 애초의 욕망과는 다르게 생(生)에 대한 집착으로 욕망이 변하게 되었다.  욕망의 본질이 변했음에도 자신의 본래 목적인 사랑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무연의 모습에서 지드가 언급하는 갈증의 의미를 확인하게 되었다.

 

  『지상의 양식』이 발표되기 전, 사람들의 욕망을 정의하는 틀은 종교와 계급제도였다.   1900년대 초반 종교라는 틀에 갖힌 채, 그 틀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하고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지상의 양식』은 창틀 너머로 펼쳐진 드 넓은 평야이고 푸른 바다였다.  옷을 더럽힐까 두려워 흙장난을 못하고 커온 아이가 마음껏 신나게 흙장난에 몰입하는 경우처럼 그 당시 젊은이들은 '지상의 양식'이 주는 '새로움'이라는 의복을 입고 자신에게 그 의복이 어떤 모습으로 비출지를 거울로 살펴보고 그 옷을 입고 한바탕 바깥 나들이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을 살았던 알베르 카뮈와 같은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일상이라는 한 뭉터어리로 방치된 내 과거라는 덩어리 속에서 빛나는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사에 월차를 낸 햇살 따사로운 어느 오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햇빛에 녹아내리듯 잠이 들어 잠결인듯 꿈결인듯 들리던 계란장수의 마이크 소리와 무더운 여름 손 빨래를 땀을 뻘뻘 흘리며 하다가 문득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으며 느꼈던 청량감, 햇빛에 바삭하게 마른 빨래에서 맡아지던 구수한 냄새 등, 지나고 보면 그저 일상이었을 한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느꼈던 감촉, 냄새, 맛, 소리 등은 언제나 현재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내가 살아있음을, 그 느낌이 온전히 나만의 것,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파도는 파도를 뒤따르고, 어느 파도나 거의 자리도 옮기지 않은 채 똑같은

물방울을 밀어 올린다.  오직 형태만이 돌아다닐 뿐.  물은 휩쓸렸다가 파도와

헤어져 결코 함께 가는 법이 없다.  모든 형태는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같은

존재로 나타날 뿐이다.  ~나의 영혼이여!  어떠한 사상에도 얽매이지 말라. 

어느 사상이든 난바다의 바람에 던져버려라.  바람은 네게서 그것을 걷어내 가리라. 

너 자신이 사상을 하늘에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부단히 움직이는 물결들이여!  나의 사상을 그처럼 비틀거리게 만든 것은 너희들이다!  너는 아무것도 파도 위에 세울 수 없으리라.  어떤 무게로  눌러도 파도는 달아나고 만다.  」p74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새들이 자연스럽게 지저귐을 통해 자신들에게 깃든 신성을 드러내듯이 시인은 언어의 발화(發話)를 통해 사물에 깃든 신성을 드러내는 소명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지드가 밝힌 시인의 소명(보는자 린세우스 편)을 확인하며 나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떠올리게 되었다.(<지상의 양식>이 베르길리우스의 '목가'를 인용하듯 횔덜린의 작품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지드가 햇빛 아래 놓인 사물들에 깃든 신성을 노래했다면 횔덜린은 종교라는 차양이 무겁게 드리운 세상 속에서 빛(새벽)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신성의 존재를 시로써 드러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다시 읽으며 1800년대 중반에 쓰인 횔덜린의 시와 1800년대 말에 쓰인 <지상의 양식> 그리고 1941년에 쓰인 윤동주의 시가 시기와 국가를 달리하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삶의 절반>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