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허먼 멜빌>

<모비딕> :고래를 빌어 인간을 말하다.

묭롶 2012. 8. 2. 14:47

 

  『모비딕』은 기존의 소설문학이 가진 틀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때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이 책은 극중 인물인 이슈메일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고래에 대한 학문적 논문이며, 바다를 배경으로 펼처지는 한 편의 연극이자 한 편의 영화이다.  바꿔말하면 다큐멘타리적 요소를 갖고 있는 소설이자 연극 또는 영화로 볼 수 있겠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작가에게 갖는 의미를 짐작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 역시 현재와 과거라는 팩트(사실로 이뤄진)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서 꿈꾸는(가상) 픽션이기에 우리는 이 작품과 실질적 관련성(우린 고래잡이도 아니고 해상생활의 경험도 없지만)을 갖지 않으면서도 그 원류적 뿌리에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독서는 나 혼자만을 관객으로 상연되는 연극과 같다.  영화가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 대부분 유사한 감수성을 형성하는 반면, 독서는 읽는 독자의 나이, 연령, 환경, 문화에 따라 다른 감수성을 제공한다.  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과거에 느꼈던 감정과 다른 느낌을 받고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구절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는 현재의 나를 과거에 비추어 다시금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모비딕』처럼 멋진 책을 뒤늦게 만나게 된 아쉬움 또한 이 책을 읽기 위한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건 아닐까라는 자기위안용 읊조림으로 흘려버린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건 '프로메테우스 적 인간'일 것이다.  이미 알베르 카뮈가 주목하여 오랫동안 그의 작품 (『시지프 신화』,『반항하는 인간』,『페스트』,『칼리굴라』등)의 큰 원류를 형성했던 '반항'을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카뮈가 소설과 논문, 연극을 통해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반면 허먼 멜빌은 『모비딕』이라는 한 작품에 소설, 논문, 연극, 영화의 장르를 총체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 안에 또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했소. 

자신의 치열한 생각 때문에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된 인간,

당신의 심장을 영원히 쪼아 먹는 독수리,

그 독수리야말로 당신이 창조한 생명체인 것이오.」p263

 

  자연계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는 달리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해왔다.  가죽이 없으면 다른 동물의 가죽을 벗겨서라도, 불을 피우기 해서 나무를 자르고 농경을 위해 땅을 개간하고 먹기 위해 가축을 기르는 등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극복해낸 존재이다.  이러한 극복 의지를 지닌 인간을 달리 표현하자면 극복은 자연(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계에 대한 반항으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즉 극복하는 인간은 반항하는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반항하는 인간의 원류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죄로 쇠사슬에 묶여 독수리에 심장을 쪼이는 벌을 받았다.  나는 프로메테우스가 그러한 행동이 낳게 될 결과를 예상치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심을 실행했고 영겁의 시간동안 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숭고한 진리, 신처럼 가없고 무한한 진리는 육지가 없는 망망대해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 안전하다 할지라도 수치스럽게 그쪽으로

내던져지기보다는 사납게 으르렁대는 그 무한한 바다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p152

 

  『모비딕』에서 죽음이 예고된 고래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바다와 고래라는 절대적 대상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항하는 인물군이다.  그들은 육지에서의 평화로운 삶 대신 목숨을 위협받는 바다 생활을 자의로 선택한다.  육지의 삶을 사는 우리의 눈에는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선택을 놓고 허풍선의 객기로 치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회라는 조직에 길들여진 채 그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목숨을 연명하는 내게 우리의 보편가치로 봤을 때 미개인인 작살잡이들의 말과 행동이 문명인의 비굴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관도, 관대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관대도 내 것일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p681~682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사람들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그건 그 산이 내 앞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사회화라는 판옵티콘 속에서 회색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잊고 산지 오래다.  언제나 우리 입을 통해 나와야할 모범 답안은 정해져 있고, 우린 앵무새처럼 그것을 뱉어낼 뿐이다. 『모비딕』을 읽으며 우리는 내 가슴 속 깊이 에이헤브 선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필경사 바틀비 』에서 변호사 사무실의 한쪽 벽면을 말 없이 오랜 시간 응시하는 바틀비의 모습은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서 고래의 물줄기를 찾아 망루에 올라선 에이헤브의 모습과 닮아 있다.  나 또한 내 속에 오래 숨겨져 있던 에이헤브를 만나는 순간 가슴이 터질 듯 한 감동을 맛보았다.  아마 이 책이 명작인 이유는 이러한 감동이 민족과 문화와 시대를 달리하지 않을 거란 점이다.  오랜만에 책을 읽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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