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묭롶 2011. 11. 6. 22:30

 어린시절엔 막연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왠지 근사한 일 같았다.  이십대가 되고서는 삼십이 되기전에 젊음을 간직한 채로 죽고 싶었다.  젊은 베르테르처럼(사실 절친이랑 서른 전에 스위스로 가서  눈 속에서 같이 얼어죽기로 약속도 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죽기로 약속했던 시간에서 십오년도 넘게 더 살아 불혹이 목전에 다가왔다.  지금도 계속해서 나이를 먹고 있고 이십대를 정점으로 육신은 늙기 시작했는데 나는 젊다는 걸 느끼지도 못한 채 늙어가고 있었다.  그렇게보면 젊다는건 그럴 인식하는 현재의 어떤 시간, 즉 젊음이 과거가 되는 시점이 되어서야 인식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삶을 현재와 다가올 미래로 이어지는 진행형으로 받아들이지만 실상, 인식체계로서의 삶은 과거와 현재가 모여서 이뤄진다.  젊음도 마찬가지이다.  젊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젊음이 과거가 되어야한다.  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가는 것처럼 젊음은 과거의 시간속에 화석처럼 각인된 이후에야 인식 가능한 대상이 된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조로증에 걸려 젊음의 기억을 갖지 못한 채 팔십대로 늙어버린 열일곱살의 소년이 열일곱 시절의 부모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 소설 속 소설(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이는 팩트(열일곱이었던 부모의 이야기)와 픽션(한아름의 소설), 소설(김애란의 소설)과 소설(소설 속 인물인 한아름의 소설), 늙음(한아름)과 젊음(한아름의 부모)의 대비를 위한 장치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한아름이라는 부조리한 인물만으로도 동전의 양면(늙음과 젊음)을 모두 보여줄 수 있음에도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소설만이 갖는 미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소설은 인류사에 걸쳐 계속되온 질문들에 대한 답이다.  살면서 의문을 가지면서도 생활에 치어 잊어버렸거나 제쳐두었던 의문들은 소설을 빌어 재구성된 상황 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구현된다.  이 작품에서도 한아름이 겪어보지 못한 젊음은 작중인물이 자신의 부모의 젊은 시절을 소설로 쓰면서 간접체험(소설로 재구성하면서)하는 형태로 보여진다.  

 

 「나는 조금 전에 적은 메모 아래 닮은 꼴 질문을 하나 추가했다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그러다 뜻밖에도 방금 전까지 쩔쩔맸던 문제의 실마리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자식를 통해 그걸 보든 거다.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p79-80

 

  작가는 나이는 열일곱이지만 조로증으로 인해 신체나이는 팔십인 한아름(늙음과 젊음을 동시에 가진 이중적 인물)을 통해 현재와 과거 그리고 '젊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한다.  과거 작품들이 젊음을 드러내는 장치로 회상을 택했다면, 김애란은 조로증에 걸린 한아름이 갖는 부조리(늙었다고도 젊다고도 할 수 없는) 속에서 눈부시게 푸른 빛(허연의 시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을 건져올린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가수 이상은의 (언젠가는)이라는 노래의 가사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이제와 다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한아름과 한아름이 쓰는 소설은 영화속 투명인간에게 뿌린 페인트처럼 실체화되지 않는 젊음의 구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특히 그 구체성은 누군가 살았던 과거(회고되는)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소년을 통해 복원된다는 점에서 기존 소설과 대별된다.  그 차이점 때문일까?  비극은 더 이상 회고되고 돠풀이되는 아픔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되고 그렇게 소설의 저층에 깔린 낙관의 기운이 이 소설을 젊게 만드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