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정유정>

<7년의 밤>

묭롶 2011. 4. 10. 21:35

 

『내 심장을 쏴라』이후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른 인터넷 서점에서 그녀의 이름 석자를 보는 순간, 기대감으로 몸이 떨렸다.  아리아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한 호흡의 긴 고음을 듣는 것처럼 그녀의 문장은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몰입과 황홀을 경험하게 한다. 

 

  그녀의 전작을 읽을 때도 난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금요일에 책을 받고 토요일에 책을 읽으며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만삭의 배를 감당하지 못하는 허리 탓에 침대에 누워서 이 책이 끝나는 마지막 장까지 난 극중 세령리에 머물렀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p521~522

  작가의 말처럼 『7년의 밤』은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그러나'에 해당하는 부분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트라우마'다.  중년의 한 부부가 있다.  어느날 아내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남편은 아내의 요구에 당황하며 일년동안만 유예기간을 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아내는 일년의 유예기간동안 남편이 상처를 줄때마다 벽에 못을 박겠다고 말했다.  일년이 지나고 아내는 벽에 무수히 박힌 못을 보여주며 다시 이혼을 요구한다.  남편은 또다시 일년의 기간동안 자신이 노력하고 잘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못을 하나씩 뽑으면 되지 않느냐며 아내를 설득했다.  다시 일년이 지나고 벽에 못은 다 뽑혔지만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은 수긍할 수 없다며 항의했지만 아내는 벽에 남은 못자국이 이유라며 결국 이혼을 했다.  길게 적었지만 여기에서 '못자국'이 바로 '트라우마'가 된다.  노력을 해도 맘 속 깊은 곳에 묻어도 무른 점토에 파인 채로 굳어버린 긁힌 자국처럼 그것은 무심코 만진 손길에 걸리적거리는 이물감이자 인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기도 한다.

 

  극중에서 이 트라우마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최 현수'이다.  그는 어린시절 우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수수밭의 정경을 평생동안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트라우마'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조차 그를 자유롭게 놔두지 않는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고, 아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은 더 큰 불행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비극의 그날밤을 날마다 '복기'하며 자신의 아들에게만은 자신에게서 기인한 '트라우마'를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이 작품은 '트라우마'앞에 한 없이 약한 인간이지만 '무엇'을 위해서라면 강해지는 인간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며, (극중 오 영제라는 인물을 통해 '트라우마'가 자의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며 최 서원을 통해 자의로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우리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며 자신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ps: 나의 트라우마는 '자살'이었다.  가족 중 자살한 사람이 있으면 자살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조사가 있었던 것처럼 언제나 '그러나'의 경우가 생길때마다 '자살'은 나의 편안한 포기의 동반자로 여겨졌다.  삶은 언제나 '그러나'의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갔고, 그때마다 나는 편안한 포기의 길을 떠나버린 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일으켰던 그 '무엇'들을 다시금 생각케한 『7년의 밤』을 읽으며 정유정 작가의 공력이 단순히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한 문장구성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 작가 자신의 '인생'에 있지 않을까를 짐작해보게 된다.

 

PS2: 이 작품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이 소설이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의 정 유정의 소설이자, 극중 인물 승환에 의해 쓰여진 소설이다.  '세령'에 '블루 오브'되어 떠나지 못하고 최 서원을 보호하며 소설의 마지막 장 '은주'를 완성시키는 그의 모습은 이 년동안의 시간을 '세령리'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문장으로 구조물을 하나하나 쌓아올린 작가의 모습과 겹쳐진다.  삼인칭의 시점을 택했던 전작 『내 심장을 쏴라』와 다르게 승환이라는 인물의 소설을 빌어 7년 전 밤에 일어났던 사건 너머의 진실을 진술하게 하는 작가의 장치가 극의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