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문예사조사(2)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묭롶 2008. 12. 23. 15:50

 

 1)구조주의의 특성과 내용

 

  <노스롭 프라이의 구조주의>

  북미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1950년대 이후 사고방식은 더욱 과학적인 것에 치중하게 되어

비평에 있어서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기 위한 새로운 비평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기존의

신비평보다 더욱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학이론으로서의 해답을 1957년에 캐나다인 노스롭

프라이는 『비평의 해부』를 통해 찾고 있다. 

  프라이는 문학이 자체적으로 객관적 체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비평은 문학을 구성하는

법칙들을 공식화함으로써 체계적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는 이 법칙을 원형에서 찾고 있다. 

즉 문학작품은 원형들에 의해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모든 문학의 근저에

희극적인 것, 낭만적인 것, 비극적인 것, 반어(反語)적인 것이라는 네 개의 ‘이야기 범주’가 있는데,

그들 각각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네 개의 신화소들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 식으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 신비평과는 달리 역사 자체의

거대한 폭과 집합적 구조들을 모두 가진 대체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한 데 있다.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에 대한 어떠한 지시행위로부터도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체계가 하는 일이란

그 상징적 단위들을 어떤 외부현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서로간의 관련 안에서 재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표현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그들은 이 보편적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한 것이다. 

 

  <구조주의와 설화학>

  구조주의는 설화에 대한 연구도 혁신시켰다.  실제 구조주의는 전혀 새로운 문학과학인 설화학을

탄생시켰는데, 설화에 대한 현대의 구조주의적 분석은 프랑스 구조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에 관한 선구적인 저작에서 비롯되는데 그는 겉보기에 서로 다른 신화들을 몇 개의 기본적인

주제들의 변주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신화는 일종의 언어이다.  신화는 개별 단위들인 신화소로 분해될 수 있는데 이는 언어의

기본 음성단위인 음소와 같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었을 때만 의미를 얻는다.  그렇다면 그런 결합을

관장하는 규칙들은 일종의 문법으로, 즉 이야기의 심층에서 신화의 참된 ‘의미’를 구성하는 일련의

관계들로 간주될 수 있다.  신화는 사유의 도구인 동시에 현실을 분류하고 조직하는 방식이고, 어떤

특정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닌 바로 이런 기능이 신화의 의의이다.  구조주의는 개별 주체에게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개별 주체는 더 이상 의미의 원천이나 목적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설화학은 종족의 신화라는 활자화되지 않은 ‘텍스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이야기에까지

이 모델을 일반화시키려는 것이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문학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노력은 1960년대에 현대 구조언어학의 창시자인 페르디낭드 소쉬르의

방법과 통찰을 문학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면서 번성했다.  소쉬르는 각각의 기호는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씨니피앙과 씨니피에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의미는 기호 안에 신비하게 내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며 다른 기호들과의

구별작용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그는 사람이 실제 한 말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대화를 가능케 한

객관적 구조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랑그라고 불렀다.  즉 그는 빠롤(말)보다 랑그(언어)를 연구했고

후자를 객관적인 사회적 사실로, 전자를 개인의 임의적이고 이론화할 수 없는 발화(發話)로 보았다. 

이러한 언어의 본성을 밝히기 위해 소쉬르는 무엇보다 먼저 언어가 말한 바를 억누르거나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기호가 나타내는 지시대상, 현실의 대상은 기호의 구조 자체가 더 잘 검토되도록

하기 위해 보류되어야 했다.  구조주의와 현상학은 둘 다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해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아이러니컬한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구조주의와 기호학>

  기호와 의미를 구별하고 기호의 구조를 분석하는 구조주의적 노력은 프라하학파의 저술활동에 의해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기호학’이라는 말과 대체로 동일하게 되었다. ‘기호학’은 기호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뜻하며 문학적 구조주의자들이 실제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기호학은 한 기호가 나타내는

바의 ‘외연’과 다른 기호들과의 연관인 ‘내포’를 구분하며, 규칙에 지배되는 의미산출 구조들인 약호와

그것에 의해 전달된 전언(傳言)들을 구분하고, 서로서로를 대신할 수 있는 기호군 전체, 즉 ‘연합적인’

것과 기호들이 하나의 ‘사슬’안에서 서로 짝지어지게 하는 ‘통합적인’것을 구분한다.  또 문학비평과

문학의 관계처럼 하나의 기호체계가 다른 기호체계를 나타내는 ‘메타언어’, 하나 이상의 뜻을 가진

‘다의적인’기호들과 다른 많은 전문적 개념들을 논한다.

 

  <체코 구조주의자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이상으로 체코 구조주의자들은 작품의 구조적 통일성을 주장했다.  즉 작품의

요소들은 역동적인 전체의 기능들로 파악되어야 하며 텍스트의 특정한 한 층위가 다른 모든 것을 ‘변형’,

즉 자신의 힘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체코

구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은 폐쇄된 체계로 파악되지만 무엇이 예술작품으로서 가치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회․역사적 환경의 문제인 것이다. 

 

  <로만 야꼽슨의 구조주의에 의한 언어의 시적기능>

  로만 야꼽슨은 러시아 형식주의와 현대 구조주의의 중요한 연관을 마련했다.  그가 언어학 분야의

일부로 간주했던 시학에 특히 공헌했던 것은,  ‘시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기자신과 일종의

자의식적인 관계에 놓임에 있다는 생각이다.  ‘시적인 것’에서는 기호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즉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평상적인 관계는 깨지게 되며 기호는 그 자체 가치대상으로서의 어떤

독립성을 허락받는다.  또 야꼽슨은 소쉬르가 암시한 은유적인 것과 환유적인 것의 구별을 분명하게

한다.  은유에 있어서 하나의 기호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데 그 이유는 둘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환유에 있어서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야꼽슨의 그의 유명한 정의에서 “시적

기능은 선택의 축에서부터 결합의 축으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한다” 라고 말한 이유이다. 

야꼽슨, 얀 무까르조프스끼, 펠릭스 보디쮸까 등의 프라하 언어학파는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현대

구조주의로의 이행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시작품들을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서 파악했다.  이런 기호들은 그 자체로서 연구

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호와 지시대상, 단어와 사물

간의 관계가 지닌 자의성에 대한 소쉬르의 강조는 텍스트를 그 환경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율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직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예술은 관습적인 기호체계들을 낯설게 만들고 파괴시켜서

언어의 물질적 과정 자체를 두드러지게 하여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로트만의 구조주의에 의한 시 언어의 기능분석>

  로트만은 그의 저서『예술적 텍스트의 구조』와 『시적 텍스트의 분석』(1972)에서 시적 텍스트를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층진 체계로 본다.  모든 문학

텍스트는 여러 개의 ‘체계’들, 그러니까 어의적, 상형적, 윤율적, 음성적 등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체계들 사이의 부단한 충돌과 긴장을 통해 그 효과를 얻는다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각 체계들은

다른 체계들이 깨뜨리게 되는 기대의 규약을 설정하면서 다른 체계들이 그로부터 이탈하는 규범을

나타내게 된다.  시작품의 한 체계가 너무 빤한 것이 될 위험에 처했을 때 바로 다른 체계가 그 체계를

가로질러 혼란시킴으로써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문학작품은 사전적 의미가 가진 여러 ‘층위’

들의 충돌과 압축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부단히

변형시킨다.  그리고 어떤 두 단어든지 무언가 등가적인 측면을 근간으로 해서 병립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하겠다.  텍스트의 각 단어는 형식적 구조들 전체에 의해 여러 단어들에

연결되고 그래서 그 의미는 항상 ‘다중규정되며’, 항상 여러 다른 규정자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각개 기호는 여러 가지 다른 ‘연합적 패턴’ 또는 체계들에 동시에 관련되며 이런 복합성은 기호가

편입되는 ‘통합적’ 사슬, 즉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구조들에 의해 더욱더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로트만에게 있어 시적 텍스트는 ‘체계들의 체계’요, 관계들의 관계이다. 

 

  <바슐라르와 베베르의 구조주의>

  바슐라르는 문학에서 문학적 이미지는 말들을 움직이게 하고 말들에게 상상 기능을 돌려준다고 본다. 

그렇기에 문학적 이미지란 새로운 꿈의 상태로, 상상하는 욕구로 풍요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학적

이미지는 상상적 과장의 동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데 이는 과장은 문학적 이미지의 기본 범주이기 때문이며,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현재형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학적 이미지는 현재형의 상상력의 발화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문학 속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수용된다.  그는 문학 작품 속에 발현된 상상력의 현상학으로서의 이미지에 주목함으로써

구조주의라는 큰 방법론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베베르는 시 작품의 기원을 한 작가의 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그것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의 주제로

다시 정리하는 구조주의적 활동에 의거해 찾는데, 기호로서의 그의 주제는 유년기의 사건이나 정황이라는

시니피에와 그것의 문학적 표현이라는 시니피앙을 갖고 있다.  그는 한 작가의 작품 전체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작품의 기원을 모티프라고 보는데 그는 모티프가 예술가의 개인적 주제와 통개인적 주제의

복합체라고 보고 있다. 

 

  <골드만과 토도로프의 구조주의>

  골드만은 문학적 작품을 창조하게 한 구조화 현상에 주목하는데 이는 작품이 개인적 생활과 사회집단,

그리고 현실적 구조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 의해 삽입, 간섭 받는 과정을 통해 글의 실제 의미에 도달하는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토도로프는 구조주의를 소설에 가장 융통성 있게 적용한

서사론자로서 소쉬르의 언어학에 기대어 문학 전반에 걸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언어학에서

빠롤이 랑그의 증명, 혹은 구체적인 발현이듯이 문학에서도 작품의 보편구조의 증명, 혹은 구체적인

발현이라고 본다.  그는 랑그와 빠롤은 상호 보완적이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방법과 통찰을 문학에 적용하면서 시작되어 프라하학파와 로만

야꼽슨, 로트만, 베베르, 바슐라르, 베베르, 골드만, 토도로프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문학에 의한

구조주의의 범주 안에서 여러 방법적인 해석들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공통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조주의의 수확은 문학에 대한 가차 없는 ‘탈신비화’를 뜻한다.

  전통 비평은 때로 문학작품을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창문 이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구조주의에서는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텍스트는 실제로 이 심층구조의 ‘복사물’일

따름이고 따라서 구조주의 비평은 이 복사의 복사가 된다. 

  ◎구조주의는 현실의 대상을 괄호 안에 묶어버린다.

  구조주의자들은 작품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나 작품을 낳은 조건들, 또는 작품을 읽은 실제 독자들과의

연관성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며 단지 그러한 현실들을 괄호 안에 묶는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개별 주체의 표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이다.  여기에서 주체는 효과적으로 숙청당하며 비인격적인 구조의 기능으로 축소된다.  달리

말하자면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 개인의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경험(역사적)인 상식들을 부정한다.

  구조주의에서 언어는 개인에 앞서는 것이며 개인은 언어의 산물이다.  또한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된다.  구조주의의 과거 상식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던 경험(역사적)적인 것들에 대해

부정한다.  하지만 이 구조는 단순히 언어행위의 ‘결과’일 수가 없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이 그로부터

비롯된 ‘최초의 기호’를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소쉬르가 분명히 하듯이 한 기호는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기호를 전제하며, 후자 또한 다른 기호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으로의 움직임이다.

  주체 없는 기호들의 사슬로서 ‘언어’는 ‘객관적으로’바라보아진 말이나 글이다.  담론이론은 사실상

부르조아 개인주의의 역사적 성장과 밀접하게 연관된 ‘시장적(市場的)인 언어관인 것이다.  그 언어관에

따르면 의미는 상품처럼 나의 소유이고, 언어는 화폐처럼 내가 나의 의미라는 상품을 역시 의미의 사적

소유자인 다른 개인과 교환할 수 있게끔 하는 일련의 표찰일 따름이다. 

  ◎구조주의 비평

  구조주의의 방법에 의한 비평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이야기가 위대한 문학작품이 아니라도

구조주의에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가치평가를 문학작품의 좋고 나쁨을 가리는 행위로

생각하여 부정했다.  가치평가를 피하는 구조주의의 소심한은 실상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청난

지배력을 행사하는 과학적 실천이라는 소외된 이론에 얼마나 기만당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구조주의는 상식에 대한 계산된 모독이다.  구조주의는 이야기의 표층에 드러난 의미를 거부하고

대신 이야기 안의 어떤 심층구조를 분리해 내려 하는데, 그것은 텍스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텍스트를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으로 ‘치환한다.  셋째, 텍스트의 특정한 내용들이 치환 가능하다면

그 이야기의 진정한 ’내용‘은 곧 그 구조라는 발언이 성립된다. 

  ◎‘메타비평’으로서의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연구하는 대상이 ‘문학작품’들이 아니라 ‘문학체계’ 즉 문학작품을 식별하고 해석하는

도구가 되는 약호와 장르와 관습의 전체 체계라고 했을 때, 이때 문학비평은 일종의 ‘메타비평’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어떤 구조주의자는 비평가가 텍스트를 해독하는 데 ‘적절한’약호들을 식별하여

그것을 적용하고 그리하여 텍스트의 약호와 독자의 약호가 점차 수렴되어 단일한 지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독서과정에 대한 지나치게 소박한 생각이다.  하나의 약호를 텍스트에 적용하면 그것은

독서과정에서 수정과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  즉 똑같은 약호를 계속 적용하여 읽으면 그 약호가 ‘상이한’

텍스트를 산출하여 이번에는 이 텍스트가 독서의 도구이던 약호에 변형을 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문학텍스트는 ‘약호확인적’일 뿐만 아니라 ‘약호산출적’이고 ‘약호파괴적’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약호들을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독서방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즉 ‘능력 있는’ 독자는 정태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

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절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외한적인 전제들의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구조주의의 ‘이상적인 독자’

  구조주의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상적인 독자라는 개념은 특정한 텍스트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결정하기 위한, 텍스트의 함수인 것이다.  구조주의가 설정한 이상적 독자는 실상 모든

사회적 제약요인들로부터 면제된 초월적 주체이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조차도 완전무결하게 텍스트를

읽어낼 수 없다는 모순에 봉착한다. 


2) 탈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특성과 내용에 대해 각각 서술하시오.

  ‘탈구조주의’라는 사고방식은 씨니피앙을 씨니피에로부터 분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의미가

기호 안에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한 기호의 의미가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는 항상 그 기호에 부재(不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미는 씨니피앙의 사슬 전체 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것이므로 하나의 문장을 읽을 때, 그 의미는 항상

어딘지 유보되며, 지체되었거나 미래에 올 어떤 것이 된다.  이러한 씨니피앙의 사슬 속에서 하나의

씨니피앙은 나를 다른 씨니피앙에게 넘겨주며 그것은 또 다른 것에 나를 넘겨주는 상호 연관성을 갖게

된다.  결국 이전의 의미들은 나중의 의미들에 의해 변화를 겪고, 문장이 끝날지라도 언어과정 전체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일차적 의미보다는 항상 더 많은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다. 

  기존에 구조주의가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의미의 위계질서의 확고한 토대를 가정했던

반면, 탈구조주의는 의미사슬 속에서 모든 기호가 다른 것들에 의해 영향 받거나 그 자취가 남겨지며

그 결과 결코 밑바닥이 드러나지 않을 복합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게 된다. 단어들이 상대적 안정합적

의미를 구성하려면 그들 각각은 앞서간 단어들의 영향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앞으로 올 단어들의

영향에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런 만큼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 있는’ 기호란 없다.  결국 의미는

분리 또는 분절이라는 과정의 결과이며, 다른 기호와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또한 기호를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나의 의미는 항상 분산되고 분열되며 자신과 동일성을

결코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기호 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완전히 드러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실은

언어가 고전적인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안정한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라는 상칭(相稱)단위들을 포함한 잘 정의되고 명료하게 한계 지어진 구조 대신에,

이제 언어는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고 또 그 자취가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나가는 거미줄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된다.  서양철학은 ‘육성’에 중심을 두고 글을 깊이 회의하는 ‘음성중심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좀 넓은 의미에서 ‘로고스 중심적’이었다.  서양철학은 다른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기호,

즉 ‘초월적 씨니피앙’과, 모든 기호들이 그것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는, 근거의 구실을 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의미인  ‘초월적 시니피에’를 열망해 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신이 질서를 부여하고

정착시키려 하는 바로 그 언어 안에 들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초월적 의미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이러한 존재는 바로 허구이다.  그 이유는 의미작용의 끝없는 활동 속에 얽혀들어 있지

않은, 따라서 끝없는 활동 속에 얽혀들어 있지 않는 개념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은 이러한 씨니피앙들의 활동 속에서 어떤 의미들이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특별한 위치로

승격되거나, 다른 의미들이 그 주의를 돌도록 강요되는 중심이 될 뿐이다.  하지만 서구 형이상학은

단선적인 진화로서의 역사이론이나 언어이론들이 갖는 기호의 거미줄 같은 복잡성, 즉 실제 과정 속에서의

언어의 왕복운동, 좌우운동, 그리고 존대와 부재 사이의 운동을 놓치고 있다.  탈구조주의가 ‘텍스트’라는

말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거미줄 같은 복잡성이다. 

  실제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비평을 최초로 탄생시킨 것은 모더니즘 운동이다.  탈구조주의에 있어

‘비평’과 ‘창조’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없다.  양자는 모두 ‘글’ 자체에 수렴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에게 강박증에 가까운 관심거리가 되었을 때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언어에

대한 관심은 19세기말과 20세기에 이르러 서구에 있어서 언어가 심각한 위기의 격동을 겪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렇듯 구조주의는 역사에서 언어로 도피했는데, 탈구조주의가 등장하면서

구조주의의 반동적인 면으로 본 것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다름 아닌 구조의 개념 자체였다. 

이렇듯 구조의 탈구조주의는 국가의 권력구조는 파괴할 수 없게 되자 언어의 구조를 뒤엎는 것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했다.  탈구조주의의 적은 어떤 종류든 일관된 신념체계들이었는데,

특히 사회구조 전체를 분석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려 한 모든 형태의 정치이론과 조직이 적대시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데리다와 다른 이들의 저작은 소박하게 재현적인 언어이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폭로될 수 있었던, 진리․현실․의미와 지식의 고전적 관념에 심각한 의문을 던졌다.  의미, 즉 씨니피에가

단어나 씨니피앙의 일시적 산물이며, 항상 변화하고 불안정하며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부분적으로

부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일정한 진리나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의문에 대한 절대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바로 지금 말하는 바는 단순히 씨니피앙의

일시적 산물에 다름 아니며 결코 ‘진리’이거나‘진지한’것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 처리하는 것 또한 비록 그런 특색들이 눈에 띄게

많긴 하지만 부당하다고 하겠다.  탈구조주의는 당대의 정통 좌익정치가 실패했음을 비난함에 있어 정당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 전통적인 좌익이 하위부분들을 흡수하려는 시도에 부응하지 않았던 새로운

정치세력이 유럽과 미국의 여성운동이었다.  여성운동은 고전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편협한 경제적 초점을

거부했는데 이는 억압받는 사회집단으로서의 여성의 특수한 조건을 설명할 능력이 분명 없었고, 또 여성의

변모에 뜻있는 공헌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에로의 움직임은 이 같은 정치적

 요구에 대한 반응인 일면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정치투쟁이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여성운동은 어떤 경직된

조직형식들이나 ‘지나치게 전체화하는’ 정치이론을 정당하게 거부했다.  여성해방론과 탈구조주의 사이에는

또 다른 관계들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파괴하려고 애쓴 대립쌍들 중에서 남녀 사이의 위계적인 대립이

가장 악질적인 것이라고 인식했다.  여성해방론은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쟁점, 여타의 정치적 사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특별한 ‘캠페인’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모드 면을 해명하고

탐구하는 차원에 서 있다.  전체로서의 탈구조주의 안에는 그 미래사를 예측할 수 없는 현실적 갈등과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자크 데리다와 탈구조주의>

  자끄 데리다는 과거 서양철학이 제1원리(형이상학)를 만들려는 충동까지 없앨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데리다는 자신의 저작 또한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형이상학적 사유에 불가피하게 ‘오염되어’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제1원리든지 자세히 검토해보면 그것은 제 1원리가 특정한 의미체계를 외부에서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항상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데리다는 글 자체에

궁극적으로 모든 체계와 논리를 회피하는 어떤 것을 ‘방산(放散)이라고 부른다.  데리다에게 있어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 든다. 

  자크 데리다는 ‘서구의 형이상학’의 비평을 수정하는 데 있어, 니체와 하이데거를 따르고 있다.  그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비판하며 인간의 언어, 특히 말하기를 통해 자기 현존을 스스로 표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는 행위는 글을 쓸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와 ‘일치하는’듯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글을 쓸 때는 내 의미가 나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든다.  왜냐하면 나는 내 생각을 인쇄라는

비인격적인 매체에 맡기게 되며, 인쇄된 텍스트는 지속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를 지닌 까닭에 예측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회람되고 묘사되고 인용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데리다는

글쓰기는 말의 2차적 재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글쓰기는 말과 화자와의 직접적인 관계인 현존을 파괴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현존과 말의 이런 연결이 서구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는 주춧돌이며 따라서 부숴버려야

할 가장 견고한 돌덩이라고 보는 것이다.

 

  <롤랑 바르뜨의 탈구조주의>

  롤랑바르뜨는 일관된 주제는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과 연결된 것이다.  바르뜨에게 있어 ‘건강한’기호는 자신의 자의성에 주의를 모으는 것으로, 자신을

‘자연적인’것으로 속이려 들지 않고, 의미를 전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의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위치를

또한 알리는 것이다.

바르뜨의 견해에 의하면 위의 ‘자연적 태도’에 상응하는 문학적 이데올로기는 사실주의이다.  하지만 사실주의

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실주의나

재현적인 기호들은 바르뜨에게 본질적으로 불건강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현실을 기호의

개입 없이 인식한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기호로서의 자기위치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반영’,

‘표현’, ‘재현’으로서의 기호는 언어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결국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구조주의자로서의 바르뜨는 ‘내용’보다 ‘형식’의 과학이 될 뿐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 여전히 문학에

대한 ‘과학’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유행의 체계』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궁극적인 메타언어란 존재 할 수 없다.  바르뜨는 『평론집』에서 “가능한 한 오나전하게 자신의 언어로 텍스트를 감싸는”것이 비평이라고 말한다.  그의 『비평과 진실』에서 비평적 담화는 ‘작품의 1차언어 위를 떠도른 2차언어’로 파악된다. 

같은 글에서 문학언어 자체가 현재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탈구조주의적인 용어로 규정되지 시작한다. 

이러한 ‘분기점이 되는 저작’은 발자끄의 소설 「싸라지느」에 대한 감탄할 만한 바르뜨의 연구『S/Z』

(1970)이다.  문학작품은 더 이상 안정된 대상이나 한계지어진 구조로 취급되지 못하며, 비평가의 언어는

과학적 객관성의 주장을 완전히 버린다.  이러한 바르뜨의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조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

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나 소설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에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환원이 불가능하게 다원적이고 끝없는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

보는 견해로의 움직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바르뜨는 텍스트는 ‘구조’라기 보다는 ‘구조화’의 끝없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문헌: 테리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中 제3장과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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