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J.M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야만인을 기다리며

묭롶 2008. 11. 27. 22:54

 

  얼마전 J.M 쿳시의 『추락』을 읽으며 인간의 사고에 대한 잔인할만큼의 통렬한 해석 앞에

오랫동안 묵인해왔던 내 자신의 본질에 대한, 아니 내 사고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심층부에

대한 고찰로 인해 한 동안 나는 불편한 몸매를 벌거벗은 채 드러낸 듯한 수모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만큼 소설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그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철학을

신랄하게 표현해 내는 그의 능력에 난 이미 매료되어 있었고, 난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만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80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토착세력이었던 야만인과 대치상태에 있는 지역이

불분명한 제국의 국경 변방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치안판사는 꽤 오랜 시간동안

삼천여명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치하면서, 야만인이 그들 주변에 있음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이를 그리 심각

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무기력할 정도로 평안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그저 제국이 토착민을 몰아내기 전에

그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굴해내는 일을 소일삼는 한가로운 관리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문물인

썬글라스로 눈을 가린 제국의 관리 '죨'이 찾아오게 되면서 그의 일상에서 희미한 안개와도 같이 실체가 없었던

야만인들은 존재감을 갖는 구체성을 띠게 된다.  예전에 그가 기억하는 야만인은 간혹 겨울에 찾아와 물물교환을

하는 그것도 너무나 순진해서 매번 거래에서 변방의 주민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약자들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위험요인인 야만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제국의 지시를 그는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구체성을 띠게 된 야만인들에 대한 의문(자신이 알고 있는 야만인들이 제국에서 위험하다고 판명한

그들이 맞는지에 대한)은 야만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던 중 제국의 관리인

'죨'에게 잡혀와 고문을 당해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눈이 멀고 한쪽 발을 못 쓰게 된 채 구걸을 하는

그녀(소위 제국이 말하는 야만인)와의 만남을 통해 야만인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체된다.  그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으로 인해 그녀를 그가 만났던 여자들과 같이 대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게 된다.

  그녀를 통해 제국이 그녀(야만인)에게 저지른 상처들을 씻기고 만지면서 그는 그녀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게 되면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지만, 그의 행동은 제국에 대한 반역행위로 판정되어 그녀를

야만인들 곁으로 보낸 후 돌아온 그는 구금된다.

 

  그가 제국의 고문으로 인해 불구가 된 그녀에게 갖는 이상스러울 정도의 집착은 자신 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제국에 대한 반문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제국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커질수록 그는 제국의 횡포가

자행되지 않았던 그녀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는 일에 집착한다.  그가 기억하는 야만인과 제국이 그에게 주입

시키려는 야만인의 간극이 컸기에 그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제국에 유린당하기 전의 그녀 모습을 복원함으로써

진정한 야만인의 실체를 확인해야만 했다. 

 

「"제국의 안보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최근에 그들을 이유 없이 공격하고, 그들에게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그런데

시장에 있는 가게에 들러보면, 어느 쪽이 어느 쪽한테 저울 눈금을 속이고 고함을 치고 협박을 하는지는 분명

하게 알 수 있소.~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P87~88

 

  그는 그녀의 상처받은 몸을 통해 제국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된다.  결국 '야만인을 기다리는' 것은 제국일

뿐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고리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야만인'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제국은 그 거주민들에게 '야만인'을 경멸하고 자신의 발 아래 놓는 우월한 지위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그것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그것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그것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산다.」P228

 

  이 지점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제국의 지배와 통제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열풍이 뜨거웠던 80년대 대중의 중지를 모아낼 민주정권을 원하던 대중들의

요구 앞에 위기를 느낀 군사정권은(전두환 쿠데타정권) 5.18을 일으켜 군부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대학생의 죽음에 분노하여 거리로 뛰쳐나온 많은 민중들을 죽이고, 이를 북한정권이 개입한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매도했다.  비단 이뿐인가.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북한이 둑을 터트리면 서울은 물에 잠긴다며 연일 뉴스에서 보도해댔고, 선거철만 되면 무장공비 침투며 땅굴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통해 대중을 공포정치의 압제하에 두었다. 

  또한 문제는 이러한 지배(제국)와 피지배(야만)의 구조가 정치적인 부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를 가진자는 갖지 못한자를, 배운자는 못 배운자를, 선진국은 후진국을, 강자는 약자를...등등의 무수히

다른 형태의 제국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제 3국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 나라에 온 약자를

보는 자신들의 시각을 떠올려보면 알게 될 것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제국민들이 야만인을

경멸했던 것과 같은 경멸을 우리 스스로 내부에 간직하고 있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지배구조의 문제는 약육강식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지배구조의 고리는 항상 이를

지탱하는 중간세력에 의해 공고해진다.  이 중간고리는 또한 자신들 밑에 또 다른 피지배자를 두는 데 대한

우월감을 통해 유지된다.

 

「~나는 엄마의 옷을 움켜쥐고 맨 앞줄에 서 있는 작은 소녀의 얼굴을 본다.  ~아이는 공포에 떨면서도

호기심 있는 얼굴로 몸집이 큰 남자들이 벌거벗은 채 두들겨 맞고 있는 모습을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표정을 띠고 있다.  ~그건 증오나 피에 굶주린 욕망이 아니라 너무나

강렬한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너무 강렬해져 그들의 몸이 그거에 의해 고갈되고, 눈만 살아 있는 것

같다.  새롭고도 탐욕스러운 욕망의 기관인 눈만이 말이다.」P179

 

  지금 우리는 나보다 상대적인 약자를 내 발밑에 두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타자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바라

보고 있지 않았나를 되새겨봐야만 한다.  제국이 주는 지배의 떡고물의 달콤함이나 선정성에

도취되는 순간, 우리는 약자를 짓밟는 제국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닌

남, 그리고  문명과 문명사이, 나라와 나라사이, 종교와 종교사이에는 다름이나 좋고 나쁨의 이분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정해야할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