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소설습작(에헤라디여!)

에헤라디여! 그 시작!!!

묭롶 2008. 11. 6. 11:56

 

 모든 일에는 그 시작이 있었으니, 태어남도 곧 시작이요.  그 생명의 잉태 또한 시작이다.

난 어처구니 없게도 혼자 집에서 세 캔째의 맥주를 마시던 중 내 음주의 시작점이 어디였는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뭔가 거창한 인생의 목표점을 떠올린 것도 아닌 지금까지 되돌아봐도 내 인생의

오점일뿐인 음주의 시발점이 궁금해지다니.....대략난감이다. 

 

  그래... 그곳....시작점은 '스마일'이었다.  지하층 특유의 습기에 찬 곰팡내와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시절이 한참 지난 팝송이 흐르던 퀴퀴한 공간 속에 칸막이로 나뉜 테이블이 10여개쯤

있었던 호프집.  무슨 일인지 비뚤어지겠다는 L과 함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내를 배회하다

문득 눈에 띈 상호 '스마일', 왠지  그나이에 벌써 삶이 버거웠던 우리를 웃게 만들 것 같은

상호에 이끌려 우리는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L과 나는 혹시 모를 미성년자 단속에 대비해서 바로 보여줄 수 있게끔 신분증을 호주머니에 넣고

땀에 찬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물론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했으므로 그간 각종 회식 등에서 술을 마실 기회는 있었으나 '미성년자에게 술을 권하다니 제

정신이세요!'란 과격한 언사로 거절해왔던터라 술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터졌는지 -나 오늘 비뚤어질거야!'라는  L의 단호한 말만 없었더라도 인생에서 술을

만나게 되는 시기는 좀 더 훗날이 되었을 것이다. 

 

  머쓱하게 담뱃진에 눌린 테이블만 손가락으로 눌러보는데 그 위로 시커먼 속지 없는 양장본

겉표지 같은 메뉴판이 놓여지고 주문을 기다리는 종업원이 보였다.  L과 나는 뻘쭘하게 메뉴판을

펼치고는 조그만 소리로 잠시 후에 시키겠다고 말하고는 본격적으로 메뉴판 분석에 들어갔다.

  소주2,500, 맥주3,000, 생맥주500cc 1,500, 마른안주 6,000, 과일안주 15,000, 노가리 6,000 등

분식집 메뉴판에만 익숙하던 우리에게 메뉴를 선택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주류계에 오랫동안 거금을 쾌척하시면서 봉사하셨던 아버지를 둔 내가 선택을 했다.  언뜻 기억해

봐도 아버지에게서 풍겨나오던 독한 알콜의 흔적은 소주란 놈이 분명했다.  왜냐면 놋그릇에 한 사발

따라 드시는 걸 봤으므로....난 처음부터 그렇게 망가지고 싶진 않았다.  또 순간적으로 동네아저씨

들이 구멍가게 평상에서 마른멸치나 새우깡 나부랭이들을 펼쳐놓고 맥주를 마시던 장면이 떠올랐다.

  뽀얀 솜사탕 같은 거품이 살포시 얹힌 노란색의 액체를 단숨에 쭈욱 들이키던 아저씨들의 모습이

왠지 주전자 막걸리를 마시던 아저씨들보다는 폼이 나 보였기에 난 OB3병과 마른안주를 시켰다.

 

  종업원이 우리에게 기본안주인 팝콘을 두 번째로 가져다 준 후 다시 세 번째의 팝콘그릇과 함께

주문한 메뉴는 나왔다.  내가 메뉴를 주문하는 동안 말 없이 손톱만 물어뜯던 L은 옆 테이블의

아저씨들을 슬쩍 보더니 대범하게 혼자 컵에 맥주를 들이부었고 곧이어 우리는 컵을 넘쳐 테이블

위를 향해 쏟아지는 맥주거품을 구경하게 되었다.  곧이어 세 번째의 팝콘을 가져다 줬던 종업원이

인상을 쓰고 밀걸레를 들고 왔고 L은 당황해서 밀걸레를 뺏어서 자신이 손수 바닥을 마구 닦았다. 

  그동안 난 정신없이 테이블 위의 넵킨을 몽땅 쏟아부어 흘린 맥주를 수습했다.  휴.... 하지만

거금 6,000이 들어간  마른안주는 맥주를 촉촉히 머금은 젖은안주가 되어 있었다.  마구 비뚤어지

겠다던 L은 밀걸레질을 한 후 진이 빠졌는지 의자에 널브러졌고 우린 아직도 남아있는 2병의 맥주를

노려보며 다시 재 시도를 할 준비를 했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삼아 나는 컵에 맥주병을 기울여서

신중하게 따랐고 한참동안의 시간이 지나서야 L의 잔까지 채울 수 있었다. 

 

  뭐든지 처음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준다.  L과 건배를 하고 경건하게 어른들처럼

단숨에 들이키려던 우리는 마시려던 의욕이 코로 역류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밀걸레 이후 코까지

맥주로 청소하고도 우리 앞에 맥주는 아직도 한 병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 쓴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쓴것을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먹어대는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L과 나는 한 모금

홀짝이고 젖은안주 먹고 그마저도 다 먹고선 팝콘을 다시 여섯번째까지 얻어먹고서야 맥주 3병을

다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 중 "너가 먼저 먹자고 했잖아.  너 더 마셔!", 손을 나를 향해

휘저으며 "나 배가 불러서 숨이 안 쉬어져 너가 더 먹어"라는 실강이가 있었다.  한 달 월급 45만원에

밑빠진 독과 같은 집으로 다 들어가고 한달치 버스토큰을 사고 나면 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3만원

남짓인데, L과 나는 무려 15,000이나 투자했으니 첫 모험치고는 거창했다.

 

  그날 L은 나를 만나면 술 마시고 실컷 울고 망가질려고 했다고 한다.  밀걸레 사건과 맥주역류사건으로

그날은 L의 사연을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함께 치뤄낸 동지애와 어른들만 하는 행동,

바로 술마시기를 성공해서 우리가 비로소 어른이 됐다는 가슴 뿌듯함을 경험했다.  사실 우린 직장에서는 

학생과 어른의 중간단계인 애매한 자리라서 그 또한 스트레스 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술을 처음 경험하게 되면서 생의 아픔을 교과서 같은 도덕적인 승화가 아닌

나쁜일(술마시기)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어쨌든 그날 L은 술을 마시고 

'비뚤어지겠다고 맘 먹게 만들었던 일'을 잊고 씩씩하게 돌아갔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렇게 나쁜 것도 좋은 것이 되고, 좋은 것도 항상 정답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 인생사 뭐있나

~에헤라디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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