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베아트릭스 포터>

<피터 래빗 전집> 우리에게는 드라마(꿈)가 필요하다.

묭롶 2019. 4. 21. 13:03

  나의 어린시절은 보통의 기준에 비춰 봤을 때 불행했다. 딸만 내리 셋을 낳은 엄마는 아들을 낳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할머니에게 아들손주가 아닌 손녀들은 필요없는 부록보다 못한 존재였다.  아빠는 운영하던 공장 상황이 나빠질수록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빈도가 잦아졌고,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는다는게 무엇인지 모른 채 나는 자라났다.

  하지만 나는 꽤 어린 나이에 혼자 한글을 터득했고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황혼 녁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현실이 아닌 동화 속을 모험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감을

나는 혼자만의 비밀처럼 간직했다.  만약 나의 어린시절에 동화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피터 래빗』의 저자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화가 주는 힘을 아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녀는 가정교사의 아픈

아들 노엘에게 동화 『피터 래빗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줬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시절 읽었던 『소공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처할지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나에게 동화책은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보다도 더 좋은 친구였고, 나의 불우한 가정에

동정심을 표하는 학교선생님보다 더 든든한 동반자였다.  물론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동화책은 소설책으로

바뀌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언제나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피터 래빗 이야기』가 전집으로 엮여서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책을 주문했다.  저자인 베아트릭스 포터는

수채물감으로 식물과 꽃을 세밀화로 그려내는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의 작중인물과 닮아있다.  사물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뿍 담긴 삽화들은 보는내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뚱뚱해서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모들을 대신해서

장을 보러갔다가 요리사에게 납치됐던 꼬마 돼지 로빈슨의 이야기는 글을 읽는내내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몸이 아파 앓아 누운 재봉사 대신 시장이 결혼식 때 입을 예복을 짓는 생쥐들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인간보다 더 나은 배려심은

어린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동화의 마법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수리 부엉이 브라운 영감 앞에서 알랑거리며 까불다가

꼬리가 잘린 장난꾸러기 넛킨과 인형의 집에서 못 먹는 모형 음식을 다 때려부수는 못된 생쥐 두마리 이야기는 내 주변의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피터 래빗 전집』을 읽으며 나는 어른에게도 동화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현실이

사실관계 만으로 이뤄진다면 고구마만 몽땅 먹은 것처럼 삶은 팍팍해질 것이다.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에게 '소설 쓰고 있네'

라고 말하거나 그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소공녀』 세라에게 일어났던 마법같은

기적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드라마'를 써야 한다.  아마도 베아트릭스 포터는 자신의 현실에서 실현이 힘든 모험을

주변의 '토끼', '돼지', '닭', '다람쥐' 등의 의인화를 통해 대신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쓴 동화가 그녀 자신을

현실을 바꾸는 환경운동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