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2019 이상문학상>

201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말'(언어)의 죽음을 예견하다.

묭롶 2019. 4. 5. 13:10

  나는 며칠 전 영화 <어스>를 봤다.  <어스>는 인간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이 자신의 원본을

찾아가 죽이고 자신들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내 보인다는 내용의 스릴러물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만약 자신들의

목적을 애들레이드에게 들려주는 애들레이드의 복제인간인 레드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슬래셔 무비에 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괴성을 지르며 인간을 살해하는 복제인간들로 이 영화가 채워졌다면 영화 <어스>는

단순한 볼거리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제인간 레드의 입을 빌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건네고 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살아간다의 요건에는 '말하기'도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영화 속에서 말하지 못한 채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 하는 복제인간들을 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분명히 우리는 영화속 그들과는 달리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의 형식을 빌어 나오는 말이 지닌 전달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게 된다.  언어는 의사전달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하는데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 과정 중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말을 하는 과정에서도 내 말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계속 의심한다.  이제 언어는 전달이

아닌 표현을 위한 기능에 우선순위를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닐까? 


「 정민은 희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없는 자신이 괴로웠다.

~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엄격한 청교도식 가르침 때문에

그는 자기 지분을 주장하는 일에 서툴렀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윤기와 생기를 스스로 확보하는 법을 알지 못했고,

자신이 고갈되는 것을 막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외로웠다.

그런데 희은을 보면 자신이 가해자라는 생각만 더해졌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中 p60


 올해 『이상문학상작품집』을 읽으며 나는 영화 <어스>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복제인간들이 원본인간들의 행동과

삶을 따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혼란을 느끼다 괴물이 되어버리는 과정은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졸업 후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집사서 애들 낳고 잘 사는게 정답이라고 배워왔다.  이러한 모범답안 외에 한 부모 가정이나 다문화 그리고 가정폭력이나

이혼, 학대 같은 건 사회가 제시하는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이런 예외상황에 처하는 경우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  가끔은.......... 제가 커다란 스노우볼 위를 기어 다니는 달팽이 같아요.

스노우볼 안에는 예쁜 집도 있고, 웃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선물꾸러미도 있고,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저는 그걸 계속 바라보면서 들어가지는 못해요.

들어갈 방법도 없는 것 같고.  」  <일 년> 中 p332


  왜 나는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가?  라는 자책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다.  사회가 인정하는 '나'에 맞추기 위해

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맞지 않는 침대에 놓인 사람처럼 잘리고 늘려진다.  그 잘리고 늘린 내 모습은 과연 '나'인가?

그러한 '나'들이 금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말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듣지만 듣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  그 일을 영원히 계속하죠.  오직 나를 위해서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그런 건?」  <대니> 中 p124


 윤이형이 반려동물인 고양이의 죽음을 빌어 결혼의 죽음을 그리고 제도의 죽음을 얘기하는 건 그만큼

인간을 통한 언어전달의 효과에 회의를 느껴서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끼리 마음을 나누지 못한 채,

순무와 치커리라는 고양이를 통하거나 <대니>처럼 인조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야만 진심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바로 그렇게 언어의 기능을 의심하고 그 기능에 회의를 느끼는 지점에 올해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놓인다.  작년에

손홍규의 대상 수상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가 폭력적 현실을 판타지 속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그려낸 것과는

다르게 올해 이상문학상 수장작들은 영화 <화양연화>에서 말 못할 비밀을 돌 속의 구멍에 속삭이는 양조위처럼

현재라는 병을 앓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표현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 내밀한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윤이형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에서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혼 후 '나'를 찾게 된 정민과

희은은 대화(언어)를 통해 서로의 진심을 전하는데 실패했다.  최은영의 <일 년>에서 정규직인 나와 기간제 계약직인

다희는 서로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장은진의 <울어본다>에서는 인간끼리의 소통에 실패한 나 대신 울어주는

냉장고가 등장한다.  장강명의 <현수동 빵집 삼국지>에는 같은 구역에 자리잡은 세 곳의 빵집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다 한 곳이 문을 닫고 빵집 점주의 딸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 <대니> 中 p128


  어쩌면 소설속의 나''들처럼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말'하는 기능을

잃어가는지도 모른다.  뉴스나 신문이 보여주는 사실 그대로가 산이라면 소설은 그 산을 이루는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한 개를 다룸으로써 보여지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앞으로를 예견해낸다.  예를 들어 산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병이 들었다면 그 한 그루에서 전염되어 산 전체의 소나무가 병이 들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금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소통하지 못하는 나''들을 통해 언어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도 자꾸만

나는 이 책을 읽고 계속 영화 <어스> 속 말 못하는 복제인간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