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팡팡 터지고 싶지만 대부분 불발탄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묭롶 2019. 2. 3. 14:38

  설 명절을 앞둔 금요일 밤에 요즘 흔한 말로 빵빵 터진다는

영화 <극한직업>을 보러갔다.  영화는 말 그대로 수시로

웃음보가 빵빵 터졌다.  실컷 웃으면서 이렇게 제작자가 의도한대로 웃기고 재밌으면 좋은데 안터지는 대부분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안터지는 영화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인생의 빛나는 한 방을 꿈꾸지만 현실은 천만관객은

고사하고 제작비조차 건지지 못하는게 대부분이다. 


「  어쩌면 내가 여기 앉아서 눈도 떼지 않고 지켜보기

때문에 이애가  깨어나지 않는 건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여기 없으면 스코티가 깨어날지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p107


  지렁이가 피부호흡을 위해 끊임없이 습기진 땅을 찾아 굳은

땅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뚫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일평생 아무 의미도 없이 막막한 땅바닥에서 꿈틀대다

운 없으면 방향을 잘못 잡아 햇볕에 타죽거나 발길에 밟혀

죽는게 일상 다반사다.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 <대성당> p305~306


  레이먼드 카버를 『대성당』을 통해 처음 만났지만 그의 단편소설이 지닌 '리얼리즘'의 가치를 나는 이 책 한권을 통해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불행으로 점철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그러한 삶들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그의 단편들을 읽으며 나는 문학을 통해 '인간'이라는 불가해 한 존재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게 되었다.


「미스 덴트는 정신을 차리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핸드백에 권총이 있다는 말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날 초저녁에 한 남자를 죽일 뻔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기차 소리를 들었다.  」<기차> p213


  그의 단편 <비타민>, <신경써서> 등에서 작중화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소통하지 못한다. 

<기차>에서처럼 우리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속 인물들처럼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채 살아가지만 서로에게

말하지 못하는 '타자'에 머무른다.  아주 우연히 짧은 시간동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등장하는

빵집에서의 대화처럼 진심으로 통하는 순간도 있지만 그건 인간의 기나긴 삶에 대비할 때 찰나에 불과하다.

  그런면에서 인간은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는 존재와도 같다. 


「그는 그렇게 뭔가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린과 관계된,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 <열> p254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서의 주인공처럼 인간은 얼마든지 알콜에 의해 망가질 수 있는 존재이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같이 어느순간 느닷없이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닥치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경우들을 통해 작가는 <열>의 작중인물 칼라일처럼 시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의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어찌보면 그의 단편소설집은 단편소설의 모음이지만 그 자체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룬 한 권의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장편소설이 하나의 서사를 중심으로 한정된 등장인물과 제한된 배경 그리고 일정정도의 시간 속에서

어떠한 결론에 이른다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모음은 그 한편 한편 모두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지닌 압축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 단편을 읽은 독자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으로 말미암아 독자는 책을 읽고난 후에도

계속 소설속 인물들을 떠올리게 되고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의 단편소설의 결론은 읽는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대성당> p311


  장편소설이 독자의 감정이입을 위해 배치해 놓은 수 많은 장치들(사건의 개연성과 인과관계 그리고 통일성 등)을 배치한

것에 대비(예를 들어 주인공이 왜 자살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 등)하여 단편소설에서는 그러한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다.  바로 그러한 개연성의 부재가 독자가 참여하는 열린 이야기로서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우리는 <대성당>에서 맹인을 처음 만나게 된 '나'만큼이나 '맹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세계를 보는 법을 이해하게 된 '나'에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실로 오랜만에 허먼 멜빌의 『모비딕』 만큼의 감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