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행복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보여주다.

묭롶 2018. 12. 27. 18:48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종교적인 신념에 의해 고행을 자처하는

사람은 있지만 불행을 자처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자신의 현재가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불행 속일지라도 사람들은 지금만

벗어나면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힘을 내곤 한다.


    종교에서는 사후세계의 천국은 고통도 불행도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이는 달리 얘기하자면 영원히 행복이 지속된다고 볼 수 있겠다.  만약 인간이

영원토록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천국일까?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쓴 『멋진 신세계』는 A. F. 632년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서 인류는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 알파-베타-델타-

감마-엡실론 계층으로 구분되어진다.  사회유지를 위한 지적활동에 필요한 알파

계급은 한개의 난자에 수정된 한개의 정자로 된 한 사람이지만 나머지 계급은

각자의 영역에 필요한 인력공급을 위해 한개의 난자에 전기자극을 줘서 최대

96개까지 배아를 만들어내는 보카노프스키 처리를 통해 최대 96명의 쌍둥이로 태어나게 된다. 


"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에 따라서 산소를 더 적게 공급합니다.

~"하지만 엡실론들의 경우라면 인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p46~47


  거대한 인공부화장과 같은 시설에서 수정되어 유리병 속에서 태아기를 보내는 동안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의 노동을 담당하는

엡실론 계층의 태아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지능을 낮추기 위해 산소농도를 정상의 75%만 주입하는 등, 각 계급의 특성에 맞게

유전적 조작을 가함으로써 국가는 맞춤형 쌍둥이들을 생산해내게 된다. 


  이렇게 맞춤형으로 제작해낸 보카노프스키 쌍둥이들은 출생 후 오랜 시간 동안의 반복된 세뇌학습을 통해 자신이 투입될

직군에 최적화된 성인으로 길러지는데 이들에게는 주입된 사실 이외에는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애초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가능성도 가질 수 없다.  국가는 그들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안좋아질 경우에는 소마를

먹을 것을 적극 권장한다.  설혹 누군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슬픔을 느낄 필요없이 그저

소마정제를 먹기만 하면 그 즉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으니 불행을 느끼고 경험한다는 건 『멋진 신세계』에서는 힘든

일이다.

  『멋진 신세계』 속의 인공부화장과 소마정제는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의 육체는 기계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캡슐 속에 갇힌 채 전기자극에 의해 꿈을 꾸지만 시스템이 권하는 알약을 먹고 행복한 꿈을 꾸기를 원하는 영화속

인물처럼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겉으로 보기에 행복하다.  늙지 않는 건강과 위생적이고 여유있는 삶을 보장받은 데다가

자유연애까지 즐기는 알파 계급의 모습은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작중인물 버나드 마르크스는 이러한 행복권장

시스템 속에서 홀로 불행함을 느낀다.  책속 내용처럼 태아기 유리병에 있을 때 누군가 버나드의 유리병에 약품을 잘못

떨어뜨린 것 같다는 얘기처럼 그는 소마를 먹음으로써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국가에 의해 생산된 공산품(다른 알파들)이 되기를 거부하며 그 자신의 실존을 찾으려 한다.  또한 그는 성장기의

지속된 세뇌 교육으로 인해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동료들과는 다르게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문제적 인물이다.  버나드는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레니나와 함께 야생보호구역에

가서 보호구역에서 십수년 전 실종된 린다와 그의 아들인 존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온다. 

  문명세계에 온 야만인 존은 유전적조작에 의해 운영되는 시스템에 혐오를 느끼게 되고 시스템을 피해 등대로 도피하지만

그를 새로운 유희(행복)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무차별적인 접촉 시도 앞에 자살을 하고 만다. 


「'4년에 걸쳐 일주일에 3일 밤 동안 100번씩 반복되었지.'

최면 학습의 전문가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6만 2,400번의 반복은 하나의 진리를 만든다.  백치들!  」p92


  이쯤에서 인간의 행복추구가 갖는 맹점을 확인하게 된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행복을 유지하고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여러 시도 끝에 인류를 계급으로 분류하여 각 계급별로 유전적 조작을 가했다.  그리고 세뇌시킨다. 

'나는 알파라서 행복해요.'  내지는 '나는 델타가 아니라 베타라서 행복해요.' 또는 '나 엡실론은 춥지 않고 뜨거운 곳에서

일을 하니 행복해요.'라는 식으로 무한반복해서 무의식 속에 박아놓으면 무의식을 파내지 않는 한 그 절대적 믿음은 깨지지

않는다.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행복은 결정적으로 '자아'를 소멸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행복을 보장한다.

이 행복에 바로 가장 중요한 주체인 '나'는 없다. 


  어쩌면 행복은 '나'라는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 느껴지는 감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잘하지 못하지만

엉성한 모양이나마 아이와 함께 과자를 만들었을때의 기쁨처럼 '행복'은 『멋진 신세계』에서 국가가 제공하는 공산품이

아닌 수제품인것 같다.  또한 행복은 단순히 100% 행복이 아니라 삶의 과정 중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싹트는

씨앗일지도 모른다.  결국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단순히 불행을 제거(소마를 먹음으로써, 세뇌를 통해)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은 진짜가 아니다.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처럼 행복과 불행은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갑자기 고통이 없다는 사후세계가 천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동안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내가 만들어낸 성과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굳이 사후세계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