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필립 로스>

<네메시스> 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공통점을 통해 소설을 통한 예언자적 징후를 확인하게 되다.

묭롶 2018. 9. 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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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어머니를 출산중에 죽였어.

하느님은 나에게 도둑을 아버지로 주었어.

이십대 초에 하느님은 나에게 폴리오를 주었고,

나는 그걸 적어도 여남은 명의 애들한테 옮겼어p264

 

「파늘루는 병 때문에 까맣게 타버린 채 모든 시대의 비명으로

가득 차있는 그 어린애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가 슬며시 무릎을 꿇더니 나직한,

그러나 그치지 않고 들리는 그 이름 모를 신음소리들

틈에서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아무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이시여, 제발 이 어린애를 구해주소서!" 」『페스트』p291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고 나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떠올랐다『네메시스』는 2 세계대전 중인 1940년대의 미국

뉴어크에서 유행한 전염병 폴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페스트』  작중 배경도 194x년대의 오랑에서 발병한 페스트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불가항력 앞에  인간의 무기력함에 절망하면서도 안에

작중인물의 극복의지를 담고 있는대 반해, 『네메시스』는 폴리오라는 질병에 의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버키 캔터와

질병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삶을 앞으로 이끌어갈 있게  인물 아널드 메스니코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연재해와 질병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인간은 조금도 저항할 없고 이를 미리 예측할 수도 없다삶의 과정중에서

이러한 불가항력들은 예기치 않게 우리를 덮쳐 우리의 삶을 마구 구져서 던져버린 종이뭉치로 만들어버린다그동안

삶을 위치까지 끌어올리거나 유지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들은 파도 앞에서 허물어지는 모래성 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사람의 발에 밟혀서 죽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떨어져나간 개미가 다시 걸으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삶을 덮친

재앙으로 만신창이가 인간은 구겨져버린 삶을 애써 펴보려 하지만 구겨진 흔적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다.

 

   작가 한강의 작품이 말하는 것처럼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태어나는 바로 순간부터 삶은 죽음에게

언제든 집을 비워줘야 하는 빚쟁이(채무자)와도 같다.  보통때는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예기치 않은

불행이 나의 삶을 구겨버릴 삶이 바람 앞의 등불임을 깨닫게 된다.   셋방에 살다가 주인집의 괄시를 당할

새삼스럽게 설움이받쳐 올라오는 것처럼, 내편인줄 알았던 운명이 나를 마구 두들겨팰때 과연 누구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까?

 

  아마도 『네메시스』의 버키 캔터는 간절히 기도했을 응답하지 않는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삶의 촛불을 꺼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같은 폴리오에 걸려 휠체어를 타게 됐지만 아널드가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찾을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폴리오라는 질병을 세상에 만들어낸 존재에 대한 원망과 부정대신 폴리오가 망가뜨려놓은 자신의 신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가 그토록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어린아이의 목숨을 끝내 거두어버린 바로 하느님이 버키 자신에게 축복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삶은 고사하고 아이들을

전염시킨 보균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버키는 끝내 받아들일 없었다.

 놀이터 아이들을 겁박하는 이탈리아인들 십수명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 그들을 쫓아낸 버키였지만, 폴리오라는 

운명 앞에선 자신의 신념과 체력, 의지 무엇도 소용없이 처절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낫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거기 폴리오가 퍼지는 게 그곳 사람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해.  모든 유대인 때문이라고……

그래서 위케이크가 마비의 중심이 되고 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고립시켜야 한다고.  어떤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폴리오 유행병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대인을 모두 그대로 둔 채 위케이크를

태워버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사람들이 공포 때문에 내뱉는 정신 나간 소리들 때문에

분위기가 아주 나빠. 

공포 때문에 내뱉고 증오 때문에 내뱉는 소리 때문에 말이야.

나는 이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이런 건 겪어본 적이 없어.

모든 곳에서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아.” p195


  이제  『페스트』 『네메시스』에 나오는 페스트나 폴리오는 백신이 개발되어 지금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 전 유행했던 신종플루를 떠올려 보자.  그 당시 사람들은 주변에서 누군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침을 하면 경악과 비난이 담긴 눈초리로 쳐다봤다.  또 회사에서 동료가 기침이라도 하게 되면 열이 나지

않느냐며 빨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질병의 징후가 보이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혹여 플루에 전염되어 내 가족 모두가 플루에 전염되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과 내가 다른 사람을 전염시키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신종플루는 단순히 질병이었지만 질병은 개인의 차원에

머무리지 않고 사회구성원 전부를 불안과 혐오, 그리고 공포라는 한 덩어리로 뭉쳐놓았다. 



  어찌보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나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가 주목하는 것은 질병으로 인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질병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과 징후에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어떤 질병이 유행병이 되어 우리를 덮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해소되지 못한 개개인의 분노가 여기저기에서 범죄로 표출되는 상황에서 유행병은 더 큰

재앙에 이르는 촉매가 되지 않을까 싶어 우려가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필립 로스가 왜 자신의 마지막 소설로

네메시스를 쓸 수 밖에 없었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신이 있다면 그러한 신을 원망하면 되지만 무신론자인

버키가 아이들을 전염시켰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상황을 통해 필립 로스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불가항력 앞에서 우리가 최소한 인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싶었던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