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나'는 누구인가!

묭롶 2018. 8. 7. 19:24

  우연의 일치일까?  불과 하루 전 기억을 잃은 채 사라진 여자 의선을

찾아 황곡행에 오른 인영과 명윤의 이야기를 담은 한강의 장편소설

『검은 사슴』을 읽었는데, 이번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전직 탐정 기 롤랑의 이야기이다.  물론 두 소설 사이에는

작중인물이 기억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실제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서사와 정서는 전혀 다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서사는 위트 탐정 사무소에 근무했던

기 롤랑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단서들을 찾아

모으는 장(章)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그마한 단서를 근거로 사건의

전체그림을 그려내는 탐정물처럼 이 작품 속 인물은 단서들을 통해

자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는 상자를 집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와 그 역시 나에게 주었던

빨간 상자를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것이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담았던 낡은 상자들 속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다.」p99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기억을 찾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이 주변인의 기억을 모아두는 방식이다.  그들은

주변인과 관련된 사진이나 물건들을 과자상자나 낡은 깡통에  모아두었다.  마치 사진첩에 끼워두고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은 사진처럼 기억은 과거라는 상자에 담긴 비활성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오래된 사진과 엽서, 그리고 오래 전 전화번호와 주소 등을 추적한 결과 기 롤랑은 자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이

페드로이며 루비로사라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의 공사 밑에서 2차 세계대전 중 자신이 어떠한 임무를 수행했고,

그로인한 독일군의 검거를 피해 자신의 여자친구인 드니즈와 스위스의 국경을 넘는 도중 여자친구와 기억을 동시에

잃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거기서 군말없이 끝이 났다.


  설계도와 재료만 주고 실제로 만드는 건 스스로 해야만 하는 블럭 한 상자를 받은 기분이랄까.  작가의 이름이 낯설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단순명료한 문장이 마음에 든다.  그 단순한 문장 속에 담긴 무수히 많은 의미를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당신이 언젠가는 과거를 되찾게 될 거라고 늘 생각해왔지요."

~그렇지만 이거 봐요,  기.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p13


  이 책을 읽고 오후내내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단어는 바로 '나'이다.  '나'는 흔히 살아온 과거와 그로 인한 인간관계의

총합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단순히 기 롤랑의 잃어버린 과거를 상자에 담긴 엽서나 사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단순히 상자(과거)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슨 얘기냐하면 이 책의 내용대로 보자면  '나'를

구성하는데 과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에 사랑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체는

느껴지지 않고 그저 톡 쏘는 향수의 향으로 기억되는 자신의 여자친구 드니즈는 한 때 열심히 피웠지만 지금은

단 한모금도 폐로 삼켜지지 않는 영국제 담배와도 같다.  어찌보면 이 작품의 제목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낮에는 활성화되어 문을 열고 영업을 하는 '현재' 를 밤에는 문을 닫고 비활성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과거'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흩어진 메이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p130


  그렇다면 인식하는 '나'를 이루는 건 무얼까?  의식 없이 잠을 자는 순간에도 '나'이고 눈을 뜨고 활동하는 순간에도

'나'인 것처럼 '나'는 과거의 총합이 아니라 '나'라고 스스로 믿는 그 순간의 '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설 『모모』의 시간도둑에게 시간을 빼앗긴 채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삶이라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무의미하지

않을까.  중요한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현재, 바로 이 책을 읽고 후기를 쓰고 있는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