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종교가 알려주지 못하는 인간의 근원에 다가가다.

묭롶 2018. 5. 22. 12:31

    보후밀 흐라발 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평생을

두고 보고 또 봐야 할 보석같은 책이다.  이렇게 멋진

책을 평생에 한 권이라도 쓸 수 있다면 그 어떤 생이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라는 작중화자인 늙은 폐지공 한탸의 독백으로

포장된 1장부터 8장까지의 꾸러미로 엮여 있다.


  마치 작중인물인 한탸가 만들어 낸 폐지꾸러미처럼

각각의 장들은 삼십오 년째 폐지공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압축된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분명 보편의 기준으로 비춰볼 때 한탸의 삶은 실패작이다.

작중인물 소장의 눈에 비친 한탸는 언제나 지시된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게으른 인물이며, 그가 자주 가는

술집에서 보는 그는 더러운 알콜중독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한탸는 그저 하나의 폐지로 압축될 운명에 놓인 책들을 존중하고 그 책들에 담긴 문장의

향기를 음미할 줄 아는 인물이다.  곰팡이와 습기, 그리고 생쥐로 뒤범벅된 지저분한 지하실 작업장 속에서 그 더러움이

한꺼번에 압축된 폐지뭉치를 작업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작업물을 예술적 영감으로 아름답게 감싼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p16


  어찌보면 감정적으로 피폐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끔찍한(보통의 기준에서) 환경 속에서 삼십오 년째 일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도 자신만의 문장의 성채를 쌓아 올린 한탸는 수취인 불명 편지를 처리하는 작업을 하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 하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와는 정 반대편에 선 인물이다. 


  겉보기에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그가 실제로는 그러한 현실을 가장

치열하게 극복(침해받지 않는 자율성의 세계)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보통의 눈으로 볼 때 이해받지 못하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헤브 선장이며, 알베르 카뮈의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고 로맹가리 작품 『하늘의 뿌리』의  모렐과 같은 인물이다. 


「압축기의 중압에 내 몸이 아이들의 주머니칼처럼 둘로 접힌다...........

그 순간 내 집시 여자가 보인다.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여자. 

~우리는 가을 하늘에 연을 날린다. 

 ~집시 여자가 밑에서 보내는 메세지 하나가 연줄을 타고 올라간다.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p132


  얼마남지 않은 퇴직 후 작업장의 낡은 압축기를 사서 외삼촌의 정원에 자신만의 작업장을 꾸리겠다는 한탸의 소망은

사회적 기준(거의 권고사직)에 의해 박탈당하고 만다.  그는 성당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종교가 무얼 해줄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스스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마지막을 함께 하고 말았다. 

그 마지막에 그는 종교가 알려 줄리 없는 자신의 어린 집시 여자의 이름을 알게 된다. 


  작중인물 한탸의 침상 위에 놓인 2톤의 책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나에게는 어린시절 처음 내손으로 구입한

책부터 지금까지 모은 책들이 책장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책을 친구라고 부르기 시작한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친구라고 부르기 시작한 그때부터 독서는 읽는다는 행위보다는 만난다는 행위를 바뀌었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을 사귀는 조심성과 설렘 속에서 책친구의 첫장을 넘기고 그 속에 담긴 사연들을 통해 책친구를 알아가고

그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를 귀기울여 들으며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은 인간과의 교우를 상회한다.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해 온 일을 우리에게 들려주며 그 일이 '자신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라고 말하는 한탸의

현실에서의 사랑은 매번 좌절되었다.  보라색 뜨개양말에 멋들어지게 샌들을 배치해 신고 여자친구와의 첫 데이트

약속을 위해 길을 나선 그는 개똥을 밟고 그 부끄러움에 들판으로 도망을 갔다.  이후 어린시절 친구인 만차와도

스키에 실린 똥무더기 사건으로 헤어지고 그의 어린 집시여자는 나치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 소각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p89


  어쩌면 한탸의 더러움으로 가득찬 지하 폐지 작업실은 우리 모두의 삶을 상징하는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우린

저마다 끔찍한 관계와 견디기 힘든 현실 속에서 그 삶의 결과물로 무언가의 압착된 꾸러미들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물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보기에도 혐오를 자아내서 그 꾸러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치워지기

바쁘다.  보통 사람들이 그 혐오의 꾸러미로 가득찬 내면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갈 때, 보편의

기준에서 외면적으로는 삶도 사랑도 실패작으로 보이는 한탸는 자신의 내면을 향기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채웠다.


「~나는 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 

열광이라고는 모르던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펴 자신의 스튜를 끓이고

내 맥주 단지를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여자. 

빵을 성채처럼 쪼개고, 그런 다음에는 난로와 불꽃과 열기,

타닥타닥 타오르는 감미로운 불길을 보며 명상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여자.  」p85


  한탸에게서 얻는 빵조각을 성채를 쪼개듯 소중히 뜯어서 먹는 집시 여자들이 자신을 수탈해가는 기둥서방이

찍어 주는 필름없는 사진기 앞에서 취하는 포즈처럼,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는 삶(새압축기 작업장의 노동자)이

아닌 내가 느끼는 삶(어린 집시여자의 만족)의 중요성을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한탸의 마지막이 가슴아파 울었지만, 나는 이내 곧 웃을 수 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어린 집시

여자의 이름을 알게 된 한탸처럼, 아무도 얘기해 줄 수 없고 아직은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믿음과 희망을 엿 본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