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희생양 이론을 통해 인간의 초석적 폭력에 대처하는 인류사의 여러 사례를 살펴보다.

묭롶 2018. 5. 6. 23:37

  실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산 책이다.  하지만 책표지의 심각한 사진만큼이나

내용이 심각하고 문장이 대단히 학구적(현학적:역자가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식의)이어서 읽는데 시간이 참 많이 걸렸다.  하지만, 어려운 내용도 그냥 나의

이해에 비춰 쉽게 읽어보자는 맘을 먹은 나는 어디까지 가나 한 번 보자는

식으로 읽었는데 거참 의외로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았다.

 

  먼저 이 책은 그냥 두면 사회를 공멸로 이끌 수 있는 초석적 폭력에

집중한다.  쉽게 말해, 원시부족 사회에서 어떤 두 사람이 술김에 싸우다

우발적으로 살인이 일어났다고 치자.  출발은 우발적인 살인이지만, 살인을

되갚으려는 복수심에 불타는 죽은자의 가족에 의해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고

결국 복수에 복수가 거듭되면 그 부족의 씨가 마르는 건 시간문제다.

 

  이렇게 부족의 씨를 말려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 폭력을 르네 지라르는

'초석적폭력'이라고 명명한다.  그럼 이 초석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이러한 상황은 '사적인 복수'가 허용되지 않는 '법'이 제도화

되지 않은 원시사회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

되어도 '초석적 폭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영주들과 자국내의 위기(사회적 불안)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달리 말해서 중세 일본의 초석적 폭력(사회적 위기)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자신들의 전쟁이 성전('聖戰')이며 자신들의 왕은 '천황',

또 자신들을 '황군'이라고 명명한 데에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 주장하는 '폭력'과 '성스러움'이 동떨어진 것이

아닌 바로 하나의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인 르네 지라르는 고대의 신화와 제의를 통해 초석적 폭력이 불러온 '희생위기'가 제의로 탈바꿈 되는

과정을 예로 들었지만 나는 본질은 침략(폭력)인 '군국주의'를 신성화(정당성을 부여)하는 수 많은 경우들이 떠올라서

한편으론 입맛이 씁쓸했다.

 

「~제의는 공동체 내부에 질서를 회복시킨

최초의 자연발생적인 사형(私形)의 되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희생물과 그 주위에 대해서 일어난 상호적 폭력 속에서

상실되었던 일체감을 다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외디푸스와 같은 희생물은 주위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오점으로 간주되고,

동체의 평정을 되찾아주는 그의 죽음은 효과적으로 공동체를 정화시킨다. 

사람들이 파르마코스를 곳곳에 끌고다니면서 모든 불순한 것을

그 한 사람에게 덮어띄워서는,

모두가 참여한 의식을 통해서 그를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이다.  」p145

 

  하긴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어릴적 봤던 '전설의 고향' 인신 공양 편을 떠올려 보자.  마을에 질병이 돌거나

흉년이 길어지면 하늘이 노했다는 이유로 마을 뒷산 동굴에 산다는 이무기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  여기서 제물로

바쳐지는 처녀는 대부분 부유층이나 방귀 꽤나 뀌는 집안의 자식이 아니다.  제물로 바쳐져도 크게 난리치지 않을 만한

집의 처녀가 제물로 바쳐지며, 제물로 바쳐지는 처녀는 마을의 불행을 떠 안은 희생양(책의 표현으로는 고대의 '파르마코스')

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폭력이 행하는 피해는 너무나도 심각하지만

그 치유책은 아주 불확실하므로 이에 대한 예방책이 강조된다. 

 그런데 예방은 우선 무엇보다도 종교의 영역이다. 

종교적 예방책은 폭력적인 성격을 갖는다. 

<폭력과 성스러움을 뗄 수 없는 것이다>. 

희생 제의라는 엄격한 장치 뒤에는 특히 대상을 바꿔치기하는

폭력 속성의 <교묘한 ruse`e> 조작이 숨어 있다. 」p35

 

  고대의 희생제의가 직접적인 형태로 진행됐다면 어느순간부터 종교가 중개자 역할을 맡으면서부터 이 '희생제의'의

과정은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쩌면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었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인간은 언제나 종교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작업된 소고기를 먹지만, 그 도축의 과정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사회적 위기(직접적)를 우리가 볼 수 없고, 알지 못하는 신성화된

베일 속에서 처리함으로써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의 유대심을 공고히 한다. 

 

  사실 르네 지라르도 내가 책을 읽으며 이토록 내식대로(실은 내맘대로) 해석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희생위기론'의 출발은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박에서 출발한다.  프로이트는 금기(근친상간, 친부살해)에

대한 억압이 불러온 각종 정신병리학의 사례를 고대 신화(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찾았다.  프로이트가 여러가지 사례들을

통해 개인의 문제를 설명하는 열쇠를 찾으려고 했던 반면, 르네 지라르는 프로이트가 인용한 사례들 속에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 아니 인류전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폭력'(초석적 폭력)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니 큰 그림을 작은 틀

(개인)에 끼워넣기 위해 논리를 펼치는 프로이트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왜?  르네 지라르는 '폭력'이라는 커다란

원형의 세계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러가지 제의들을 펼쳐놓음으로써 그 전체의 콜라보레이션 속에서 자신의 이론의

실제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임상자료>는 좋은 구실은 되지만 알다시피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임상자료>라고 해서 아주 사소하나마,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이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무의식이니 억압이니 하는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운 개념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디에서도 이 의식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p264

 

  실은 책을 읽어나가며 르네 지라르도 출발점은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이를 위한 여러가지 사례들을

모아가던 중 '희생위기'론에 이른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책의 초반에 신랄하게 프로이트 이론의 앞. 뒤가 맞지

않음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던 그가 그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이론의 배후를 더 탄탄하게 만들게 되었으니,

 참 이분도 복이 많은 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은 도서관이라는 보르헤스 식으로 보자면 르네 지라르는 프로이트라는 지하실에서 어느 한순간 펼처진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는 '알레프'를 발견한 것과 같은 식이니 운이 좋다고 말할 수밖에.........

 

「이제 우리는 동물의 폭력에는 각각의 제동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종의 동물들은 결코 서로를 죽일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다. 

승자는 패자의 목숨은 살려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다. 

결국 동물의 개인적인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인간에게는 희생양이라는 문화적인 집단 메커니즘으로 바뀐 셈이다

종교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 없이는 어떤 사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p331

 

  프로이트에 대한 이의제기에서 출발한 이 책의 결론은 p485까지 이어지지만 『폭력과 성스러움』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인간에게는 안전장치가 없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안전장치가 없는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바로 이 책의 전하는 핵심이다.  아마 르네 지라르는 이 책을 쓸 당시까지는 그래도 종교가 인간에게

제동장치가 되어주길 바라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2018년을 살아가는 내 눈에 현재의

종교는 제동장치가 아닌 또 하나의 기폭장치이다.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많은 전쟁과 내전들이

종교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이 책이 인용하는 '카인강족의 공멸' 을

<사회적 자살>이라고 결론내린 쥴스 헨리의 표현처럼 '자멸'이 기입되어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인간 카타르마가 의학적인 카타르시스로 변하는 것은,

인간 파르마코스가 독과 약을 동시에 의미하는 <파르마콘 pha`rmakon>>

이라는 말로 변화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 p434

 

  프로이트에서 출발하여 민속학을 집대성한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고대 신화와 투치남바족의

신인풍습까지 수 많은 제의의 형태를 살피고 이를 기록하고 있다.  결론은 그 모든 제의들은 그것이 '식인'일지라도

그 제의에 따른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는 구성원들간의 초석적 만장일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종교의 초석적 만장일치가 힘을 잃은 과도기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  성스러운 순화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적어도 폭력이 민낯을 드러내고 활개치지 않도록 하지 위해 무얼 해야 할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아~ 결국 이 책의 표지 저자 표정처럼 결론은 나도 심각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