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여성과 전쟁,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묭롶 2017. 9. 19. 21:49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나는 여성문학과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전면 수정해야했다.  과거 나에게 페미니즘은 과격한 방법론으로

다가왔다.  무조건 남성과 동등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질의 과격함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술, 담배, 자유연애 등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것들에 대한

도전이 나에겐 페미니즘의 대표적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며 남성과의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만이 진정한 여성해방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여성의 자존감 회복은 남성과의 동일시에서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후 페미니즘운동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그럴수록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거부감의 원인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여성을 해방하자는 운동에 여성이 거부감을  느끼는 건 왜일까? 


  그 의문의 해답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3기니」를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여성의

자존감 상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그 첫번째는 경제적 빈곤이고, 두번째는 정서적 빈곤이다.  버지니아는 여성이 처한 종속성의 세계(혈연, 결혼, 자녀 등)가 여성의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며, 자신의 역할에 대한 충분한 보수가 없는 무급의 희생이 자존감을 말살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버지니아가 지적하는 두 가지 원인 모두 개인이 스스로 극복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페미니즘운동은 그 모든

원인을 극복하라고 개인을 다그친다는 점이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성에게 왜 맞고 사냐고 되묻는게 페미니즘

운동이었다면(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주관적 입장입니다) 왜 맞고 사는 상황을 지속할 수 밖에 없는지 살펴보는

입장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3기니」에 담겨있다. 


  그녀는 이 작품들을 통해 말한다.  여성은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남성이 필요목적하에 그 역할을 부여했고,

사회의 합리적이해가 이를 허가함으로써 여성은 기회를 박탈당한 선수일 뿐이다.  우리는 삶의 동일한 출발선에

대기하고서 출발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그  신호를 듣고 있는 힘껏 삶을 향해 뛰어야 함에도 출발선에서 저지당했을 뿐이다.  물론 그 저지된 출발이 현재의 여성문학과 여성의 현실에 대한 모든 원인이 되진 않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과거로부터 현재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한다.   먼저 그녀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성문학의 계보를

살펴본다.  이 작품은 그녀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강연을 요청받고 그 강연에 쓰일 자료를 위해 가상의 책꽂이에서 여성문학으로 분류된 부분에 꽂힌 책들을 한권, 한권 꺼내서 이를 살펴봄으로써 여성문학의 역사와 작가별 특성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씌여있다. 


「~이런 선두 주자가 없었다면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엇은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익스피어는 말로가 없었다면,

말로는 초서가 없었다면, 초서는 그 이전에 길을 열고 자연적 언어의 야만성을

순화한 잊혀진 시인들이 없었다면 글을 쓸 수 없었겠지요.

왜냐하면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자기만의 방> P101


  울프는 문학작품을 독창성에서 발로된 독자적 작품이  아닌 과거로부터 이어져내려온 문학사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다양한 경험과 다채로운 문체 그리고 다양한 실험의 결과가 과거로부터 자연스럽게 축적되어온

남성문학과 달리 먼지가 풀풀 날리는 척박한 황무지에 뿌리 내린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그 출발부터

비교불가능하단 점을 우리 앞에 자연스럽게 드러내보인다.


  그런 연약한 뿌리에서 출발해서 자기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해야하는지, 저 창문 밖 들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갇힌 존재들로부터 길어올려진 글은 그 뒤틀리고 좁은 출구(작품)로 향하는

통로의 험난함만큼이나 처참하고 빈약한 상태이다.  그런  작품들에서 문체의 통일성과 스토리의 개연성 및

자연스러운 문장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고객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버지니아는 그런 문학적 열악함의 원인이 여성작가의 빈곤과 자유시간 부족에 있다며  샬럿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을 예를 들어 말한다.  작품을 쓸 수 있는 독립공간도 없고 심지어는 글을 적을 종이마저 맘대로

살 수 없어서 돈이 생기면 조금씩 사서 글을 적었다는 그녀들의 일화 속에서 우리는 여성이 작가로서

활동하기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한게 무언지 공감하게 된다.


「~자, 여기서 메리 비턴은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녀는 픽션이나 시를 쓰려면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문에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방이 필요하다는 결론(평범한 결론이지요.)에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여러분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이런 결론을 끌어내도록 만든

생각과 인상들을 털어놓으려고 노력했지요」<자기만의 방> P158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기존 여성문학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 인정을 통해 현재의

여성문학의 문제제기로 나아가 앞으로 여성이 작가로서 충실히 작업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과 '수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문명사회에서 거울의 용도가 무엇이건 간에,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무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자기만의 방> P56~57


  이번에는 「3기니」를 살펴보자.  사실 「자기만의 방」과「3기니」는 버지니아 울프의 눈으로 바라본

여성, 전쟁, 문명에 대한 에세이(기록)로 분류되지만 내가 보기엔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보였다.  그리고

그 편지글에 적힌 정서는 호소이다.  그녀가 이 글들을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녀는 과거의 차별해소를 외치는 페미니즘을 불태우고 타인을 경쟁상대나 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교육제도를 불태워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과의 동일시를 외치는 과격한 페미니즘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와 그 문화 속에서의 조직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대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여성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3기니」에 담겨있다. 


  여성이 제대로된 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으며 정당한 수입을 받고 전쟁 방지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 각각의 단체들에 조건없이 기부를 할 수 있다는 버지니아의 전제조건이 지닌 정당성이

담겨있는 「3기니」를 읽으며 이 작품이 쓰인지 백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현실은

『82년생 김지영』이란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면 이 기니를 가지고 가서 사용하십시오. 

집을 불태워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그 창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교육받지 않은 여성의 딸들이

그 새집을 돌며 춤추도록 하십시오.

마차가 지나가고 행상인들이 소리쳐 물건을 파는 좁은 거리에 자리 잡은

그 가난한 집 말입니다.

그 딸들에게 '우리는 전쟁을 끝냈다!

우리는 폭정을 끝장냈다!라고 노래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의 어머니들이 무덤에서 웃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욕설과 경멸을 견뎌냈다!

새집의 창문에 불을 밝혀라, 딸들아!  활활 타오르게 하라!'」<3기니>p308


  버지니아 울프는 말한다.  같은 여성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페미니즘의 과도한 선동과 동참이 아닌

진정한 여성의 역할과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하고 이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과거 남성의 행위를 확대해석해서 비추는 거울의 역할에서 벗어나,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획득하고

경쟁이 아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을 길러낼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아니

진정한 여성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제도를 확대 재생산해내는 우리의 역할 속에서 세상은 타인을

적으로 삼는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상생을 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가

'3기니'를 기부하는 전제조건의 실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