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인간을 이해하는 방정식으로서의 소설.

묭롶 2017. 9. 4. 23:30


  내가 처음 읽었던 소설은 내 기억엔 추리소설이었던것 같다.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시리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으며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대부분을

보냈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긴장감과 미궁에 빠져있던 사건을 도식처럼

풀어내는 과정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추리소설에 빠진 이후로 내게 소설읽기는 추리소설의 과정처럼 소설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 되었다.  예를 들어 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다른 작가와의

연관성을 발견하거나, 한 작가의 작품 속에 담긴 동일 작가의 작품 간의 관계를 찾아

내는 과정이 어느순간 나의 독서방향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실수를 저지르고 옳지 못한 짓을 하며

서로 비방하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겁니다. 

사는 데 방해만 되는 불필요하고 시시한 짓거리들에

우리는 자신의 힘을 소진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째서 꼭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나?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심각하게 사랑해야 했고

그는 왜 모자를 가지러 내 방에 나타나야만 했을까?

그런데 모자가 여기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공포>p21,34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을 읽으며 그의 단편들이 인간의 삶을 풀어낸 방정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이 미궁에 빠진 사건의 단서들을 찾아내서 그 연관성을 통해

결론을 유추해내는 과정처럼 인간이라는 불가해의 영역을 단편소설 속의 인물들을 방정식처럼 대입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이해 가능의 영역으로 길어올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너무나 크고 그  빛이 아름다워서 핸드폰으로 찍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핸드폰에

찍힌 달은 내가 눈으로 본 달과 전혀 다른 크기도 작고 빛도 나지 않는 하나의 점이었다.  인간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많은 예술 분야가 아마 이와 같지 않을까?  실체의 본질에 가깝게 묘사(재현)하려는 몸부림들이 각각의

작품들이지만 본질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극소수이다.


  체호프의 단편집을 읽으며 그의 작품이 바로 그 극소수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호들이 체호프의 단편을 왜 최고라고 인정하는지 그의 단편집에 실린 첫 작품 「관리의 죽음」만

읽고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감정을 흔히 '복잡미묘'라는 말로 표현한다.  '복잡미묘'의 의미는 그만큼

설명해내기 어렵고 감정의 결이 중층적으로 겹쳐져 있음을 뜻한다.  그의 단편은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단편에 실린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보이는 과정 속에서 설득력 있고 공감 가게 표현하고 있다.


~"각하, 저는 어제 와서 폐를 끼친 사람입니다만"

장군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자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놀리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만 재채기를 하고 침을 튀긴 것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려던 것이었지,

놀리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감히 각하를 놀리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웃었다면 그건 높으신 어른에 대한 존경심 때문입죠.

제가 설마......


"꺼져!!"

장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빽 질렀다.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집에 돌아온 그는 관복을 벗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 누었다.  그리고......죽었다.」〈관리의 죽음〉p11~12


  그의 소설은 사건이 인물을 이끄는 구조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에 의해 사건이 형성되는 구도로 쓰여짐

으로써 사건 위주의 과거 소설들과 구분된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주인공은 오이디푸스 이지만 실제적

주인공은 '운명' 내지는 '사건'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게 될거라는 신탁(운명)에 의해 버림받았고

우연에 의해 우발적으로 아버지인줄 모르는 인물을 살해(운명)했으며, 또 자신의 어머니인줄 모르는 인물과

동침(운명)했다. 


   이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의해 비극에 이르는 인물이지 자신이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사건을 만드는 인물이 아니다.  단적으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체호프의 단편 <관리의 죽음>과 

비교해보자.  〈관리의 죽음〉에서 사건은 공연장에서 우발적으로 나온 재채기로  자신의 앞좌석에

있던 상급관리인 장군에게 침이 튀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이 과거의 소설이나 동화였다면 침이

튀어서 불쾌해진 장군이 하급관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체호프의 단편 속 작중인물인 관리를 죽게 만드는 건 관리 자신의 판단에 의한 자기자신의

행동이다.  장군은 인지하지 못하는 침 튀김 사건을 혼자 확대해석해서 사과를 해야한다고 믿게 되고

장군 입장에선 뜬금 없는 사과를 한 후 사과를 일부러 받아주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거듭 사과를 해서

결국 장군의 화를 불러일으켜서 급격한 정신적 충격으로 죽음에 이르는 관리의 모습은 오히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있음직한 사실감을 획득한다.  


  난 어린시절에 동화책을 읽으면 궁금한게 많았다.  그 궁금한걸 주변에 얘기하면 반응은 행복하게

살았다잖아.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눈에 보이는 달과 핸드폰에 찍힌 달의 차이처럼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소설들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기준점이 바로 체호프의 단편집이다.  그의 문학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며 그가 작품을 통해 방정식처럼 도해해 놓은 인간이라는 메타포는

지금도 여전히 그 빛나는 아우라를 잃지 않고 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고전을 주로 읽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ps. 체호프의 단편에 담긴 블랙 유머가 흥미로웠다.  슬프고 비극적인 상황에 동시에 배치된 유머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그리고 인간의 삶에 한발짝 더 다가감을 느끼게 된다.  단편 <드라마>에서 지루한

대본을 읽어주는 여자에게 극도로 화가 난 나머지 여자의 머리를 문진으로 내려친 후

「"날 잡아가라.  내가 그녀를 죽였다!"<드라마>p88

외치는 파벨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배심원들의 모습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터져나오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미인>에서도 아름다운 여인은 감탄과 동시에 슬픔을 느끼게 하는데 이런 이율배반의 감정을

드러내는 체호프의 표현력에 거듭 감탄하게 된다.  그나저나 난 이 멋진 책을 왜 이제 읽은걸까?


ps2: 민음사 명작고전은 책의 내용도 맘에 들지만 책의 내용에 부합하는 표지의 그림이 너무 맘에 든다.

지난번 성석제의 『투명인간』의 표지 그림인 에곤 실레의 자화상도 그렇고 이번 『체호프 단편선』의

표지인 일리야 레핀의 <뜻밖의 귀가>는 정말 절묘한 배치이다.